[이주향의인문학산책] 상처 입은 내면아이

“기억은 약국이나 실험실과 유사” / 삶 위해 ‘잃어버린 시간’ 회복해야

잃어버린 시간에 관심이 많았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기억은 일종의 약국이나 실험실과 유사하다. 아무렇게나 내민 손에 어떤 때는 진정제가, 어떤 때는 독약이 잡히기도 한다.”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은 바로 이 프루스트의 말로 시작한다. 아파트에 정원을 꾸미고, 거기서 나온 약초로 차를 만들어 잃어버린 시간을 기억하게 하는 대찬 여인의 이름이 프루스트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주인공은 폴이다. 언제나 무표정하고, 늘 충혈돼 있는 폴은 연애 한번 해본 적 없는 피아니스트다. 그에겐 생기가 없다. 젊은데도 젊지 않은 그는 조로한 것이 아니라 성장하지 않은 것이다. 더구나 그는 실어증이다. 말을 잃어버린 채 입을 닫고 살았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을 잃었다는 것이다. 그의 마음속엔 상처 입은 내면아이가 웅크리고 울고 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

생기가 없고 표정이 없는데도 그의 피아노는 수준급이다. 피아노는 그를 거두고 그를 자랑스러워해서 평생 그에게 빨대를 꽂고 살아온 두 이모 때문에 배우게 됐다. 그는 이모들이 운영하는 댄스교실에서 반주하며 살아가는데 특이한 점이 있다. 피아노를 칠 때는 반드시 ‘슈케트’를 먹는다는 것. 어떤 아이가 피아노 옆을 서성거리다 하나 남은 슈케트를 먹어버리자 그는 더 이상 피아노를 치지 않고 일어나 나간다. 슈케트를 사러 가는 것이다. 몸은 서른인데 마음은 두 살에 멈춰 있는 폴을 어이할까.



그는 두 살 때 사고로 엄마 아빠를 잃었다. 그 현장에 그가 있었다고 한다. 그 충격으로 말을 잃어버린 그는 평생 엄마를 그리워해서 엄마 사진으로 방안을 도배해 놓았다. 기억 속의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지만, 기억 속의 아빠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인간, 엄마를 폭행하는 인간이다. 그렇다 해도 서른이 된 남자의 방이 엄마 사진으로 도배돼 있는 것은 이상하다. 그는 엄마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엄마를 앓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가 우연한 기회에 마담 프루스트의 집을 방문한다. 아파트에 정원을 만들어 식물을 가꾸고, 짓지 않는 개와 살면서 우쿠렐레를 연주하는 중년의 여인은 이미 폴을 알고 있다. 여인은 세련되지도 우아하지도 않다. 오히려 여인은 거칠고 대차다. 그렇지만 따뜻하다. 그 여인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나는 네 엄마가 어디 있는지 알아. 네 엄마는 네 기억의 뿌연 물속에 있어. 네 기억은 물고기처럼 물 속 깊숙이 숨어 있단다.”

폴은 매주 그녀의 작은 정원을 방문한다. 거기서 약초 차를 마시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간다. 엄마 아빠와 살았던 기억을 회복하며, 어린 시절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 기억의 시간을 보내며 차츰 폴의 얼굴에 표정이 생긴다. 아빠는 엄마를 폭행한 것이 아니었다. 레슬러였던 그들은 경기를 한 것이었다. 아빠를, 남자를 증오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 엄마는? 엄마는 보호가 필요한 약해빠진 여인이 아니라 아들을 무한히, 충분히 사랑할 줄 아는 부드럽고 강한 여인이었다. 아기 폴을 유모차에 앉혀놓고 어른들이 피아노를 시켜야 한다, 아코디언 시켜야 한다며 그들의 기대를 투사할 때도 엄마는 이렇게 노래하며 아들을 지키고 있었다.

“내 아들은 어떤 쪽도 원하지 않아요. 내 아들은 자기 뜻대로 살 거예요, 이 아이가 한 남자가 되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은 세상이 아니에요, 사랑 한 스푼, 꿀 한 스푼, 햇빛 한 줄기가 그의 무지개가 되고, 모래 한 줌이 그의 성이자, 그림을 그릴 크레용이 되겠죠. 필요한 것은 그뿐이에요.”

너무 아픈 과거는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 잃어버린 시간이 우리를 성숙하게 하지 못하고 그 시간에 묶어놓는다. 그 시간을 기억해야 하는 것은 그 시간을 떠나보내기 위해서다. 우리는 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건너가기 위해서, 과거에 묶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거를 풀어주고 ‘자기 뜻대로’ 살기 위해서, 삶을 원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 잃어버린 시간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