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는 1992년 빌 클린턴의 승리를 이끈 역대 최고 선거 구호로 꼽힌다. 먹고사는 문제는 정치 체제를 가리지 않는다. 본지가 창간 기획으로 연재한 ‘체제전환국을 가다’ 시리즈에 등장하는 나라들도 대개 경제적 어려움이 체제 전환의 압력으로 작동했다. 헝가리, 폴란드와 같은 동구권 국가나 베트남, 쿠바 정부가 국민들의 현재, 미래 생계를 해결할 수 있었다면 체제 전환의 혼란을 감수하지 않았을 테다. 성공한 체제 전환 모델 중 하나인 폴란드의 경제 개혁을 이끈 레셰크 발체로비치 전 부총리는 본지 인터뷰에서 “(개혁 결과가)위험하더라도 희망이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 12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자주’를 20여 차례, ‘자력’ ‘자립’을 각 10여 회 언급했다. 올해 신년사에서 자주, 자력을 각각 서너 번 쓴 데 비하면 연설 분량을 감안해도 빈도수가 부쩍 높아졌다. 베트남 하노이에서의 2차 북·미회담 결렬 후 김정은식 응전이다. “적대 세력들의 제재 돌풍은 자립, 자력의 돌풍으로 쓸어버려야 한다”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은 21일 현 정세를 ‘천리마 운동’을 시작한 1956년에 비유했다. 북한 전역에서 ‘자력갱생 결의대회’가 열리고 있다. 자력갱생을 ‘심장에 쪼아 박도록’(노동신문 사설) 선동할 정도로 ‘제재 돌풍’ 위력이 크다는 방증이다.
김정은이 하노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직접 대북 제재 완화를 요구한 건 그만큼 북한 경제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석탄 등 수출 길이 막히면서 2016년 이후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해외 돈벌이 수단인 노동자들도 송환될 처지다. 외환 곳간은 쪼그라드는데 작황 부진까지 겹쳐 이번 여름부터 김정은체제는 어려움에 봉착할 것이라고 뉴욕타임스가 최근 보도했다. 타격을 가장 크게 입은 쪽은 정부 급여에 의존하는 당 관료, 군인, 경찰들이라고 한다. 김정은의 통치자금이 말라붙으면서 3대 세습체제를 떠받쳐온 중간 관료들 장악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8년 만에 열리는 북·러 정상회담은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보내는 김정은의 SOS(긴급구호신호)다.
황정미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