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걸어오는 나한상, 나를 돌아보다
나한은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은 성자다. 가장 높은 경지에 올라 신에 근접했으나 본질적으로 인간이다. 그래서 나한은 “내 안에 존재하는 깨달은 자이고, 깨달은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이다. 깨달은 삶이란 “저 멀리 아득한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천진하게 웃고, 좀 더 느긋하게 진지하고, 좀 더 여유 있게 인상 쓰고, 좀 더 편안하게 슬플 수 있는” 태도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영월 창령사터 오백나한-당신의 마음을 닮은 얼굴’ 전시회에 출품된 나한상 88점을 마주하면 ‘천진한 웃음’이 가장 두드러진다. 불교 초기 경전 ‘숫타니파타’에서 가르친 것처럼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완성된 진리에 예배하고 얻게 될 행복’의 구체적 형태가 나한상들의 미소로 표현된 것은 아닐까. ‘보주를 든 나한’, ‘바위 뒤에 앉은 나한’의 미소는 선한 눈매와 어울려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단단하고, 투박한 화강암의 어디에 이런 미소가 담겨 있었던 것인지, 돌을 다듬은 장인의 솜씨가 기막히다. 각각 백제와 신라를 대표하는 것으로 꼽히는 서산마애삼존불상, 얼굴무늬수막새의 미소와 견줘보는 재미를 누려도 좋겠다. 창령사터 나한상은 ‘강원의 미소’로 불린다.
◆나한상, 시간을 잇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시는 국립춘천박물관이 지난해 열었던 전시를 가져온 것이다. 큰 호응으로 기간을 연장하기까지 했던 지방의 전시를 서울로 옮겨와 더 많은 관람객에게 선보이기 위한 것이다. 나한상을 내어준 국립춘천박물관은 그것의 현대적 의미를 본격적으로 새겨보는 전시회를 아트인강원과 함께 열고 있다. 26일까지 열리는 ‘창령사터 오백나한 현대미술과 만난 미소’전이다. 나한상의 현대적 계승, 발전을 모색하는 동시에 참여한 26명의 강원 지역 작가들이 나한상에게서 받은 감흥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자리다.
이종봉 작가는 ‘꿈꾸는 나한’을 통해 시간을 잇는 인간애를 표현했다. 그는 “오백나한상은 낮은 자의 시선에서 서민적 형상으로 다듬어져 그 의미가 더욱 가깝게 다가온다”며 “다양한 메시지를 담은 표정과 과거-현재-미래를 잇는 인간애를 만났다”고 고백했다. 이희숙 작가는 ‘삶 속의 나한’을 통해 “나한상에 나와 이웃들의 삶을 투영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나한상을 소재로 한 어린이들의 그림 14점도 눈길을 끈다. 그림에는 나한상을 보는 아이들 나름의 생각들이 반짝인다. ‘나한상과 함께 하는 숨바꼭질’(양윤진 춘천삼육초 2학년)은 ‘바위 뒤에 앉은 나한’을 모티브로 했다. 봄날 아이와 나한상이 함께 숨바꼭질을 하는 모습을 그렸는데, “모든 것을 받아주셨던 할아버지와 함께 노는 모습을 떠올렸다”고 한다. ‘나한의 탄생’(양유진 성림초 6학년)은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패러디했다. 나한상이 수 백년간 땅속에 묻혀 있었던 사실이 안타까워 “이제는 봄 햇살처럼 따뜻하게 깨어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는 어린 작가의 마음이 따뜻하기만 하다.
국립춘천박물관 김성태 관장은 “나한상이 가진 예술성이 작가들에게는 강렬한 느낌을 주는 것 같다”며 “참여 작가들이 먼저 제안해 열리게 된 전시회다. 강원 지역에서 나한상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크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