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신의 역사는 / 고려·조선 땐 얼굴·팔뚝에 죄목 새겨 / 60년대 작은 점 새기는 점상문신 유행 / 2002년 월드컵부터 ‘조폭용’ 인식 탈피
문신 관련 업계에서는 한국 문신 인구를 80만∼100만명으로 추산한다. 문신 시술을 하는 타투이스트도 2만명 이상일 것으로 보고 있다. 한때 일탈과 혐오의 상징이었던 문신은 이제 ‘패션 문신’으로 불리며 자기표현 수단으로 대중화됐다.
문신의 역사는 5000년 전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1년 오스트리아에서는 몸에 50개가 넘는 문신을 한 5300년 전 미라 ‘외치’가 발견됐다. 중앙아시아, 이집트, 일본, 태평양 섬 지역 등 세계 곳곳에서도 고대 사회의 문신 흔적을 볼 수 있다.
한국 문신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3세기경 중국에서 발견된다. 진나라 진수가 엮은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마한에서는 남성, 변한과 진한에서는 남녀 모두가 문신을 하는 풍습이 있다는 언급이 나온다. 고려·조선시대에는 형벌 문신에 대한 기록이 주로 남아 있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에 따르면 당시 범죄자의 얼굴과 팔뚝에 구체적인 죄목을 새겨 넣었다. 조선시대에는 더욱 세분화됐다. 절도범·도살꾼·장물아비에게 죄목을 새겨 넣었고, 노비의 도주를 방지하기 위해 소유주의 재산임을 알리는 글자를 남겼다. 형벌 문신은 영조대에 이르러 ‘너무 가혹하다’는 비판과 함께 폐지됐다. 조선시대에는 형벌뿐 아니라 남녀의 사랑을 기리기 위해 ‘연비 문신’이 행해지기도 했다.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까지는 작은 점을 새기는 ‘점상문신’이 유행했다. 주로 여성들이 우정을 다짐하며 선택했다. 문신이 비행청소년과 연결되기 시작한 건 1970년대로 이런 경향은 1980년대 들어 본격화됐다. 삼청교육대가 ‘예방 차원’이라며 범죄 전력이 없는 문신 소유자까지 잡아들이면서 문신에 범죄 이미지가 짙게 드리웠다. 소년원과 교도소에서 문신이 왕성하게 행해지면서 이런 시각은 더욱 굳어졌다. 타투이스트 남궁호석씨가 쓴 ‘한국의 문신’에 따르면 1980년대 소년 수형자를 조사한 결과 37%가 문신을 소유하고 있었다. 1990년대 ‘범죄와의 전쟁’을 전하는 뉴스에도 폭력배들의 화려한 문신이 꼭 등장했다. 문신이 조직폭력배용이라는 부정적 꼬리표를 뗀 계기는 2002년 한·일 월드컵이었다. 세계 유명 축구 선수들의 문신이 방송에 노출되고 월드컵 응원 가수들의 문신도 자연스럽게 드러나면서 대중의 거부감이 줄고 문신에 밝은 이미지가 덧입혀졌다. 2003년 축구 한·일 정기전에서 중계된 안정환의 문신도 대중의 고정관념을 바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