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사각.”
4년간 자라 25㎝가 되던 해 ‘나’는 익숙한 가위 소리와 함께 미용실 바닥으로 떨어졌다. 주인 김현아(28·가명)씨는 땅바닥에 떨어진 나를 집어 작은 비닐 팩에 담았다. 그녀는 “이건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삶”이라고 했다. 내가 필요한 새로운 주인을 만날 거라는 말도 함께해줬다. 나는 현아씨의 ‘머리카락’이다.
그녀가 나를 소중히 기르기 시작한 건 4년 전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모발기부’ 캠페인을 접하고 나서다. 머리카락을 25㎝ 이상 보내면 소아암 환우를 도울 수 있는 가발이 기부된다는 캠페인이었다. 누리꾼들은 “내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누군가에겐 소중할 수 있다”며 서로 모발기부를 자랑했다. 현아씨도 ‘늙으면 머리카락이 얇아진다는데 젊었을 때 좋은 일을 해보자’고 다짐하며 기부에 동참하기로 했다.
가발이 된 나는 백혈병 환자인 은지(12·가명)양에게 보내졌다. 은지는 2년 전부터 항암치료를 시작해 고통스러운 치료과정을 버텨내고 있다. 어린 은지를 더욱 힘들게 한 건 거울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이었다. 항암제는 그 힘이 아주 강력해 건강한 세포까지 파괴한다. 이 때문에 머리카락이 빠지고 입안이 헐기도 하는데 은지는 항암치료를 받기 전 미리 머리카락을 밀었다.
민머리가 되자 은지는 점점 주변 사람들을 만나길 꺼렸다. 한번은 털모자를 쓰고 엄마와 함께 간 시장에서 “아들이 참 예쁘다”는 말을 듣고 울음을 터뜨렸다. 이런 은지에게 당당히 밖에 나설 용기를 불어 넣어준 게 바로 나와 친구들이다. 은지 엄마는 “가발을 쓰고 놀 때 은지는 병이 있다는 사실을 잊는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은지의 ‘보물 1호’로 다시 태어났다.
병원 관계자들은 은지를 “선택받은 아이 중 한 명”이라고 했다. 소아암 환자는 매년 1만 명을 뛰어넘지만 무료로 가발을 받을 수 있는 아이는 100여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현재 무료 항암 가발은 일부 민간 기관의 지원활동으로만 이뤄지고 있다. 한국백혈병소아암협회, 한국백혈병어린이재단 등 단체들로부터 모발을 전달받아 기부해 온 하이모는 월평균 6~7명에게 가발을 지원해 왔다. 항암 가발을 따로 살 수 있지만 비싼 가격에 엄두를 못 내는 소아암 환자 부모가 대부분이다. 많은 소아암 환자가 가발 대신 털모자를 쓰고 있는 이유다.
◆사라지고 있는 모발기부
이런 실정에 10여년간 계속된 모발기부 캠페인이 점차 사라지고 있어 안타깝다. 연예인과 운동선수들의 참여로 모발 기부자가 는 반면 캠페인을 진행할 인력과 재정이 부족해진 탓이라고 한다. 한국백혈병소아암협회의 ‘모발기부 캠페인’은 지난 2월28일자로 종료됐고, 가발제작사 ‘하이모’가 진행한 ‘모발기부 캠페인’도 지난달 20일 종료됐다. 현재 모발기부 캠페인을 진행하는 곳은 국제두발모발협회가 세운 ‘어머나 운동본부’가 유일하다.
소아암협회 관계자는 “모발기부가 대략 하루 80~120건이 접수됐는데 인력이 한정적이다 보니 가발 제작사와 논의과정에서 부득이하게 모발기부를 중지하게 됐다”며 “향후 재개될 가능성은 없다”고 했다. 하이모 측도 “기부된 모발 중 가발제작에 부합하는 모발의 비율이 낮은 편이었고 기부 모발을 접수하고 선별하는 업무와 비용도 많이 들어 모발 기증 캠페인을 종료하게 됐다”고 했다. 다만 협회는 기부금을 받아 매달 5명에게 무료로 항암가발을 지원하기로 했고, 하이모도 무료 가발 지원사업을 확대하기로 했다.
◆학교로 돌아가지 않는 소아암 환자들… 인식개선 절실
소아암은 완치될 확률이 80% 정도로 높고 치료기간이 성인 암에 비해 길다. 보통 소아암 환자들은 감염만 조심하면 치료 중에도 정상적인 학교생활이 가능하다. 하지만 상당수가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여성가족부의 ‘2016년 건강취약 위기청소년 자립지원방안 연구’에 따르면 소아암 환자의 68.1%가 1년 이상 장기결석을 경험했다. 그 원인으로 꼽히는 것이 탈모로 인한 외모스트레스 등 심리적 요인이다. 여가부의 연구에서 소아암 환자 54.5%는 ‘외모관리가 필요하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치료가 종료돼도 소아암 환자들의 학교생활적응 문제는 또 다른 과제로 남는다고 지적한다. 서울성모병원 소아혈액종양센터장 정낙균 교수는 “소아암 치료기간 동안 아이가 심리적 부담으로 사회와 장기간 단절되는 경우가 있다”며 “병원에서도 미술치료, 병원학교 등 환자들의 사회적응을 돕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지만 소아암 환자들을 이해하고 차별하지 않는 인식개선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머리카락을 ‘나’로 의인화해 소개한 내용은 소아암 환우회가 제공하는 사례와 모발기부자 3명과의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임.
안승진 기자 prodo@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