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로아즈베이;빛이 네게 올 것이다”
신과 인간이 만나는 곳, 힌두 사원 도시 푸티아 라즈바리 궁전에 들어서자 좁은 창으로 빛이 쏟아졌다.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데 뒤에서 이를 쳐다보던 방글라데시 청년 모히불이 오래된 벵골어 경구를 읊고 간다. 목적지를 안다면, 빛이 네게 올 것이라는 뜻. 1971년 파키스탄으로부터의 독립 후 이제 막 청년기를 지난 젊은 나라. 아직은 풍족하지 않지만, 기원전부터 시작된 깊은 문화의 보고. 언어에 대한 자부심과 독립된 문화, 영민하고 순수한 사람들과 그들이 만드는 에너지로 가득찬 나라. 연간 7%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며 이들이 앞으로 나아가는 길에 빛을 비추는 힘이다. 당신이 방글라데시에 간다면 얻어와야 하는 것은 그 빛.
◆컬러풀 방글라데시
방글라데시는 색의 나라다. 뜨거운 땅에 어딜 가나 진한 색의 향연이 펼쳐진다.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방글라데시의 색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지난 4월14일은 벵골력(曆)으로 ‘새해 첫날’이었다.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다. 이들은 이날 ‘몽골 슈바자뜨라’라는 축제를 여는데, 100만명의 사람들이 다카 시내에 운집한다. 이들이 내뿜는 100만 가지 에너지와 색에 눈이 돌아간다. 가장 좋은 옷을 꺼내입고, 화려하게 치장한 이들은 눈이 마주치는 누구에게나 밝게 인사한다. 신정, 구정이 지난 지 몇 달이 지나 방글라데시에 와서 새해 인사를 받으니 다시 시작할 기회가 주어진 것 같아 기분이 좋다.
퍼레이드에 등장하는 토속적인 후툼페차(방글라데시 부엉이), 벵골호랑이 등은 모두 방글라데시인들이 사랑하는 것들이다. 역시 화려한 색으로 치장돼 있다. 왜 이렇게 원색을 좋아하냐는 질문에 대한 방글라데시 사람들의 답. “우리가 흥이 많은 사람들이기 때문이지!”
몽골 슈바자뜨라를 놓쳐도 축제를 즐길 기회는 많다. 벵골어로 ‘우스타브’, 즉 축제는 1년 내내 이어진다. 그때마다 화려한 잠다니(방글라데시 전통 사리·긴 천을 둘러 입는 여성 전통 의상)가 등장한다. 진짜 잠다니를 좋은 가격에 사고 싶다면 다카 동북쪽 탕가일에 있는 전통 직조 마을을 들러보자. 꼭 옷으로 입지 않더라도 천 자체가 아름다워 장식용 등으로 소장 가치가 있다. 잠다니 직조는 알맞은 온도와 습도가 뒷받침돼야 하기 때문에 생산 가능 지역이 제한적이다. 또 금속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대나무로 만들어진 전통 베틀을 이용해 수작업으로 이뤄진다. 수를 놓거나 날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베틀에서 직접 디자인을 만드는데, 기원전 4세기부터 내려오는 기술이다. 2013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잠다니 직조는 대부분 가족 수공업 형태로 운영된다. 과거 남자들이 주된 역할을 한 것과 달리 요즘은 여성 참여가 늘고 있다. 여성 활동이 제한된 방글라데시에서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를 늘려 여성 권리 신장에 한몫을 하고 있다.
◆타고르의 언어, 벵골어를 쓰는 사람들
방글라데시 인구의 90%는 무슬림이다. 하지만 인구의 10%를 차지하는 힌두교도와 불교도가 이들과 공존한다. 서로 다른 신을 열렬히 사랑하는 이들을 하나로 묶는 것이 바로 벵골어다. 방글라데시라는 나라 이름 자체가 벵골어를 쓰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쿨나 주 꾸스띠아에 가면 벵골어 전통 노래 ‘랄론의 노래’와 함께 한바탕 놀아보자. 현악기 ‘엑타라’, 건반악기 ‘하모니움’, 각종 타악기로 구성되는 방글라데시 전통 가락과 함께 반복적으로 이어지는 창과 안무가 우리 마당놀이와 꼭 닮았다. 우리 마당놀이가 익살 속에 해학과 한을 담았듯이 랄론의 노래도 흥겨운 가락 속에 담은 철학의 깊이는 간단치 않다. 힌두교도였던 작곡가이자 철학자 랄론(1774)이 동족에게 버림받고 ‘이교도’인 무슬림 여인의 돌봄으로 구원받기까지, 그가 겪었던 종교적 갈등과 고뇌가 노랫가락에 담겨 있다.
꾸스띠아는 동양의 시성(詩星)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아버지의 고향이다. 인도와 방글라데시가 갈라지기 전 현재의 인도 동부 콜카타에서 태어난 타고르는 아버지의 고향을 자주 찾았고 랄론의 노래를 들었다. 윌리엄 예이츠를 밤잠 설치게 했다는 타고르의 서글프도록 아름다운 시구가 랄론의 노래와 벵골어로부터 나왔다.
벵골어에 대한 작은 관심을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방글라데시인들은 당신을 열렬히 환영할 것이다. 모국어에 대한 방글라데시인들의 집착과 사랑은 한국인에게 낯설지 않다. 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파키스탄의 벵골어 말살정책에 저항해 싸우다 다치고 목숨을 잃은 역사를 들으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유네스코는 이들이 모국어를 지키기 위해 싸운 2월21일을 ‘국제 모국어의 날’로 정하고 언어 다양성의 상징으로 삼고 있다.
◆문명의 교차로에서 만든 관용의 지혜
동북쪽 라지샤히주 파하르푸르의 불교 유적 소마푸라 마하비하라에 놀러온 무슬림 소녀들의 원색 히잡(얼굴을 가리는 천)에 눈길을 빼앗겼다. 고대 사원의 붉은색 벽돌에 그녀들의 원색 히잡이 포인트가 돼 묘한 어울림을 만들어냈다. 반은 얼굴을 가리고 반은 가리지 않은 그녀들은 반자비(전통의상) 아래 청바지를 받쳐 입었다. 그들은 그렇게 종교와 시간을 뛰어넘어 공존한다.
소마푸라 마하비하라는 위대한 사원이라는 뜻이다. 8세기, 방글라데시 땅을 불교가 지배하던 시절 지어진 높이 24m, 면적 8만5000㎡의 거대한 사찰유적으로, 현재는 붉은 벽돌에 무성히 잔디가 자랐다. 전체적으로 사각구조 사원 중앙에 탑이 있고, 주위로 177개의 승원이 이를 감싸고 있다. 규모에서 압도적이지만 전형적인 사찰구조다.
소마푸라 마하비하라는 불교 진흥기인 인도 팔라 왕조 시절 현재의 인도·방글라데시 지역에 있던 5개의 승려 교육기관 중 하나다. 뜨거운 열기를 받으며 광활한 고대 사원의 흔적을 가로지르다 보면, 부처의 가르침은 본래 깊은 산 속이 아닌 뜨거운 평원에서 왔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지각 변동에 따라 조금씩 가라앉고 있어 보존이 시급하다.
인근 도시 푸티아에는 신과 인간이 어울려 살던 19세기 힌두 도시가 남아 있다. 연속되는 아치형 무늬로 정교하게 치장된 시바신 신전에 들어서니 그 옆으로 흐르는 시바사가 호수가 창문마다 들어온다. 관능적인 시바신이 이 물로 씻고, 먹으며 살아가는 자신의 백성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시바사가 호수를 중심으로 고빈다 사원, 라즈바리 궁전이 빙 둘러싸며 신과 세속의 하나됨을 보여준다.
방글라데시 남부 쿨나주 바게르하트로 이동하면 현재 이 나라 다수인 이슬람의 찬란한 역사와 만나게 된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서아시아에서 부흥하던 15세기, 남아시아에선 갠지스강과 브라마푸트라강이 만나는 순다르반 지역을 투르크 태생의 칸 자한 알리가 개척한다.
한때 360개 모스크가 있었던 것으로 전하는 이 지역 백미는 60돔 모스크다. 이름은 60돔이지만, 사실 돔은 77개이고 기둥이 60개다. 신이 사는 집인 힌두 사원이 정교하고 화려한 장식으로 가득한 것과 달리, 기도 의식을 행하는 장인 모스크의 내부는 담백하다. 신발을 벗고 회당 내부로 들어서면 순백의 60개 기둥과 간결한 제단이 신과의 만남을 재촉한다. 제단마다 새겨진 아치형 문양은 화려하지 않지만 절제의 매력이 있다. 여백을 채우는 것은 지금도 꾸준히 드나드는 사람들이다. 하얀색 모자와 옷을 입고 꾸란을 외는 어린 소년부터 새댁, 할머니까지. 15세기와 현재를 잇는 비밀통로가 그곳에 있다.
스리랑카 등 주변국에서는 끊임없이 종교 갈등이 일어나고 있지만 주변국가에 비해 방글라데시는 종교적 관용을 가진 나라다. 일부 접경지대에는 종교 갈등이 없지 않지만 헌법으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다카·파하르푸르·푸티아·바게르하트(방글라데시)=글·사진 홍주형 기자 jhh@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