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은 옛날부터 ‘인후지지’(咽喉之地·목구멍과 같은 땅)라 불렸던 서울로 향하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그로 인해 문물의 들고 나감이 활발했다. 조선이 세상을 향한 문을 열 수밖에 없었던 19세기 말 이후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외국인 거리가 가장 먼저 생겼고, 국내에서 생산된 물품들이 외국으로 나가는 출발점이었다.
이런 이유로 인천은 ‘최고’(最古), ‘최초’라는 수식어가 자연스럽다. ‘인천민속문화의 해’를 맞아 국립민속박물관이 2017년 진행한 학술조사 ‘인천 공단과 노동자의 생활문화’를 토대로 여는 특별전 ‘메이드 인(人) 인천’이 제시하는 키워드다.
◆‘최초, 최고의 도시’
◆노동운동이 태동하다
서울의 관문이라는 지리적 이점은 인천이 산업도시로 성장하는 토대였고, 기반시설을 갖추기 위해 대규모 간척이 진행돼 인천은 근대문물의 유입지에서 공산품의 생산지로 변화해 갔다.
1906년 인천항 앞 갯벌을 매립해 철로연장 등 인천항의 설비를 확장하는 6년 계획의 공사가 시작됐다. 1910년대에는 부두, 항만 등의 건설을 위한 대규모 매립공사가 진행됐다. 해방 이후에도 이런 흐름은 이어졌다. 1960년대 후반부터 염전과 갯벌을 메웠다. 간척지는 주로 산업용지와 주거용지로 활용됐다. 주안공단, 남동공단, 인천경제자유구역, 송도신도시 등이 모두 간척지 위에 세워졌다.
산업도시 인천에서 정미업은 개항기의 대표적인 산업이었고, 1917년에는 조선인촌주식회사에서 국내 최초로 성냥을 생산했다. 1930년대에는 일제의 군수공장인 ‘조병창’이 세워져 군수공업도시의 면모를 갖췄다. 1960년대 수출주도형 경제개발계획이 추진되었을 때 인천에는 여러 개의 공단이 들어서 경공업, 중화학공업, 첨단산업 등을 담당하는 기업들이 넘쳐났다.
이런 이유로 인천은 ‘기회의 땅’이었으나 동시에 열악한 근로 조건 아래서 노동운동이 본격적으로 싹트는 곳이 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인천항만 축조공사에는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독립운동가들이 동원되기도 했는데 김구 선생도 그중의 한 명이었다. 각종 공장에서 일한 사람들은 값싼 임금, 민족 차별, 비인간적 대우에 시달리며 식민지의 현실을 깨달았고, 1920년대부터 노동운동을 본격화했다. 근대화, 산업화의 과정에서도 노동자들의 희생이 따랐다.
박물관은 공단에서 일했던 22명의 삶을 재구성해 보여준다. 제미니 자동차, 삼익피아노, 용접마스크 등의 유물과 사진자료, 인터뷰 영상을 감상할 수 있다. 전시회는 바닷바람에 펄럭이는 땀이 밴 작업복을 이용한 성효숙 작가의 ‘바닷바람에 걸린 작업복’으로 마무리한다.
전시회는 8월까지 이어진다. 1947년 강화도의 선두포 등을 조사하고 1951년 ‘한국인과 그들의 문화’라는 책을 낸 미국인 인류학자 코닐리어스 오스굿의 수집품을 보여주는 ‘인류학자 오스굿의 시선, 강화 선두포’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