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이 사랑하는 작가, 알렉스 카츠
올봄은 미술계 거장들이 몰려온 봄이었다. 해외 유명 작가 두 명의 대형 전시가 국내에서 동시에 열렸다. 서울시립미술관은 ‘데이비드 호크니’전을 진행 중이다. 영국 출신 데이비드 호크니(82)가 기존의 유명세에 최근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품을 그린 생존 미술가’란 수식어를 경매에서 더한 직후에 개막한 전시다. 원화 비율이 낮아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다는 반응도 있다. 그럼에도 국내에서 최초로 열린 호크니의 개인전이다. 티켓은 전시 개막 전부터 팔려 나갔다. 주말에는 긴 시간 동안 줄을 서야 한다.
서울이 호크니의 전시로 북적거릴 때 대구미술관에서는 ‘알렉스 카츠’전이 열렸다. 미국 출신인 알렉스 카츠(92)는 해외 예술 전문 사이트 아트시(ARTSY)가 선정한 ‘살아 있는 최고의 아티스트 10인’에 이름을 올린 바 있다. 작품 110여점을 통해 카츠의 작품 세계 전반을 보여 주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전시다. 작가의 요청으로 뉴욕 휘트니미술관에서 ‘붉은 미소’(1963)를 대여해 온 것이 인상 깊다. 전시에 대한 작가의 열정이 느껴진다.
당시 뉴욕 미술계는 추상 표현주의와 단색 추상미술이 주류였다. 미국을 대표하는 영웅으로 일컬어진 잭슨 폴록(1912∼1956)은 바닥에 캔버스를 펴고 공업용 페인트를 뿌렸다. 바넷 뉴먼(1905∼1970)은 엄격한 태도로 화면을 구성하는 작업을 펼쳤다. 둘은 확연히 다른 모습의 결과물을 내놓았는데 형태가 없는 추상 회화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카츠는 형태가 있는 구상 회화를 그렸다. 주류와 어울릴 수 없는 모습이었고 결국 자기 작품에 대한 고민이 늘었다. 잭슨 폴록의 작품 실물을 보고는 그려 놓은 그림 1000여장을 찢어 버린 적도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괴롭히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과거 인터뷰를 살펴보면 그는 자기에 대한 믿음이 강한 편이다. 이왕이면 자신만의 방식으로 근사한 그림을 그리자고 생각했다.
어느 날 TV를 보다 남다른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가만히 지켜보니 TV는 세상을 한 화면에 담아내지 못했다. 세상을 편집해 이야기를 엮어내는 모습에서 화면 구성을 찾았다. 사람의 어떤 부위를 확대, 편집한 모습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야외에 세운 대형 광고판인 빌보드와 유사한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구성은 최근의 작품까지 이어진다.
작가는 다양한 사람을 그렸다. 그중 가장 자주 언급되는 인물은 그의 아내 에이다다. 그녀는 1957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300여점의 작품에 등장한다. 싱그러운 젊은 모습부터 우아한 노년의 모습까지 그녀의 일생이 거기에 있다. 에이다는 카츠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다.
‘붉은 미소’가 에이다를 그린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부드러운 붉은색을 배경으로 에이다의 옆얼굴을 그렸다. 에이다가 주인공인 것 같지만 사실 대상을 단순화하는 과정 자체가 주제다. 에이다의 얼굴을 확대해 절제된 윤곽선으로 표현하고 그 사이 공간을 단조로운 색면으로 채웠다. 카츠는 단순하게 그린 평면을 통해 정말 중요한 것, 본질만 드러내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는 그의 작품 세계 전반에 해당하는 주요 포인트이기도 하다.
본질만 드러내려는 작가의 시도는 작품이 아닌 곳에서도 보인다. ‘노란 문’, ‘겨울 나무’, ‘마노프 숲’, ‘해 질 녘 7월’ 등 제목도 군더더기가 없다. 꽃을 그리면 제목은 ‘꽃’이 되고, 여자가 빨간 모자를 쓴 모습을 그리면 ‘빨간 모자’가 제목이 되는 식이다. 남과 다른 작업을 해도 자신을 밀어붙인 단호함이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삶의 본질, 순간을 담아내는 작품
인물을 그렸던 작품 세계는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자연으로 확대됐다. 1960년대 초부터 꽃을 그리기 시작했다. 울타리에 가득 핀 장미와 흐드러지게 핀 봉선화 등을 그렸다. 그는 꽃이 가만히 서서 바람에 흔들려도 소리 없이 움직이는 모습에 집중했다. 꽃을 자의식이 강한 고독의 존재로 받아들였다.
그 뒤 산과 들, 바다와 같은 야외 풍경을 다뤘다. 정확히는 석양이 내려앉는 호수, 햇빛이 비치는 해변의 모습 등을 그렸다. 풍경의 이미지를 재현하기보다 자신이 대상을 지각하는 순간 자체를 포착하는 데 관심을 둔 것이다. 그 순간의 느낌을 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카츠는 스코히건 회화조각학교에서의 드로잉 수업을 기억한다. 여름날 야외로 나가 풍경을 빠르게 포착해 묘사하는 식이었다. 바로 그 순간만을 생각해야 담아내고자 하는 모습을 종이에 옮길 수 있었다. 그는 과거도 미래도 실존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오직 순간만이 존재하고 그렇기에 그것에 영원성이 있다. 그가 순간을 그리는 것이 여전히 흥미롭고 재미있는 이유다.
‘꽃 2’(2010)에는 꽃이 바람에 흩날리는 찰나가 살아 있다. 배경을 흰색으로 칠해 대상 자체에 집중할 수 있다. 꽃줄기의 하늘하늘한 움직임과 바람이 간결한 붓질로 그려져 실제로 느껴지는 듯하다. 이러한 줄기의 움직임 속에 꽃잎은 노랑, 오렌지, 바이올렛 색으로 활기를 더한다.
삶에서 기억에 남는 순간을 돌이켜본다. 일에서 큰 성공을 거두거나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얻는 등 특별한 사건이 떠오를 것 같다. 정작 떠오르는 건 친구들과 강가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흔들리는 꽃을 바라봤던 때와 같은 소박한 순간이다. 친구의 얼굴도, 꽃의 움직임도, 얼굴을 스치던 바람의 느낌도 여전히 생생하다. 이 작품을 보면 그런 순간들이 떠오른다. 사실 삶의 본질은 이런 것에 있는지도 모른다.
#아흔이 넘은 노장의 힘
카츠는 올해 92세가 됐다. 분명 노인의 나이지만 여느 젊은 작가들만큼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최근 전시 이력만 살펴봐도 작가는 플로리다 탬파미술관(2017)과 메트로폴리탄미술관(2015∼2016), 스페인의 구겐하임 빌바오(2015∼2016), 영국의 서펜타인 갤러리(2016) 등 전 세계 유수의 미술 기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과거에 그린 작품을 모아 전시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 그린 작품도 보인다는 게 사실이고 놀랍다. 그는 여전히 주말도 없이 매일 뉴욕 소호의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린다. 15분이라도 붓을 꼭 잡으려 노력한다. 조깅과 수영을 하며 건강 관리를 철저히 하는 건 오로지 그림을 잘 그리고 싶어서다. 조수를 쓴 적도 없다. 아직도 사다리를 오르며 캔버스 높은 곳에 직접 붓질한다.
카츠의 작업은 준비 과정이 오래 걸린다. 정작 캔버스를 칠하는 건 순식간이다. 그는 물감이 바게트처럼 딱딱하게 굳는 것이 싫다고 말한다. 물감의 투명성을 살리려 커다란 작업이라도 가능한 한 하루 안에 끝마치려 노력한다. 사실 그림 한 점을 하루 만에 완성하는 건 꽤 어려운 일이다. 몇 시간 동안 집중력을 발휘하는 것도 그렇지만 팔을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것은 고된 육체노동이다. 70여년간 매일 붓을 잡으며 쌓인 내공이 있기에 가능한 작업 방식일 것이다.
카츠를 보면 언젠가 읽은 레프 톨스토이의 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가 떠오른다. 그는 이 책에서 “진실하며 필요 불가결한 것들은 모두 일시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오랜 시일에 걸친 꾸준한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다”고 썼다. 최근 읽은 카츠에 대한 글 중에 ‘시간은 그의 편’(Time Is On His Side)이란 제목이 있었다. 70여년을 쉬지 않고 팔을 움직여 그림을 그려낸 카츠다. 시간은 당연히 그의 편에 서야 하는 것이 맞다. 끊임없이 노력하는 카츠의 모습을 보며 많은 것을 배운다.
김한들 큐레이터, 국민대 미술관·박물관학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