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대문운동장 터에 들어선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올해 개관 5주년을 맞았다. 거대한 우주선으로 불시착한 듯한 DDP는 서울을 넘어 한국의 랜드마크, 세계적인 디자인 허브가 됐다. 세계일보는 DDP를 운영하는 서울디자인재단(대표 최경란)과 협업해 ‘서울의 디자인 이야기’를 12회에 걸쳐 연재한다. 건축과 디자인, 패션 등 DDP와 연관된 분야별 디자인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짚어 본다.
◆디자인의 역할은 ‘촉매’
우리나라 디자인 산업은 하드웨어 중심으로 성장해왔다. 디자인을 통해 구체적인 성과를 보여 줘야 했기 때문이다.
◆디자인 컨설턴트의 변화는 ‘현재 진행형’
흔히 컨설팅한다고 하면 컨설턴트의 전문적인 지식으로 컨설팅 대상의 문제를 발견해 해결을 권고하는 톱다운(Top-down) 방식을 생각하기 쉽다. 서울의 디자인 컨설팅은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로 진행됐다. 전문가에 의한 일방적이고 형식적인 문제 해결이 아니라 시민과 함께 소통하는 활동을 거쳐 숨어 있는 문제를 찾아내는 새로운 디자인 거버넌스 방식으로 진화한 것이다.
마을 문제를 디자인으로 해결하는 과정에서 지속가능한 지역 디자인 플랫폼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디자인 방법론 중에 서비스 디자인의 이론 체계를 실제 주민센터와 마을 주민을 대상으로 실행하고 적용한 것이 큰 효과를 거뒀다. 주민센터 공무원과 마을 주민들을 만나면서 그들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게 무엇인지 찾아내고, 이견을 좁혀 가는 과정을 통해 변화가 가능하다는 인식을 심어 줬다.
◆지속가능한 컨설팅 방향을 고민하고 제시
중소기업과 관공서를 대상으로 한 초기 컨설팅은 사업 주체와 디자인 컨설턴트를 일대일로 연결해 진행됐다. 기업은 우수 디자인을 지원·보급하고 디자인 생태계를 조성해 시민의 삶의 질을 향상하고, 기관은 서울의 사회적 문제를 디자인으로 접근해 해결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맞춤형 전문가 컨설팅이 이뤄졌다. 제품이나 패키지, 환경, 문화 상품, 디자인 경영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개선 방향을 도출해 냈다. 매년 80여개의 과제가 진행됐다. 이 사업을 통해 단기간 일회성 처방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깨닫고 지속가능한 방향을 고민하게 됐다.
2016년부터 컨설팅 방식이 한 단계 발전해 동 마을 사업의 문제를 디자인으로 해결하는 맞춤형 디자인 컨설팅 사업이 시작됐다. 디자인 컨설턴트 외에 청년 디자이너 1명을 사업장 현장에 투입해 디자인 제작을 지원하고 주민 참여 사업도 함께했다. 동 마을 사업을 추진하는 자치구, 유관 기관을 대상으로 환경·경제·복지·안전 분야에 대한 15개의 컨설팅이 이뤄졌고, 공공 분야에 시민 서비스 디자인이 본격적으로 접목되는 계기가 됐다.
지난해부터는 서울시 정책사업 과제를 디자인으로 해결하는 디자인 컨설팅이 진행됐다. 서울시는 부서별로 주택·교통·건강·문화생활 등 도시의 서비스를 혁신하기 위한 다양한 과제를 추진 중인데, 서울디자인컨설턴트들이 여기에 함께하게 된 것이다.
◆디자인은 ‘참여를 이끌어내는 지난한 과정’
복잡한 도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디자인 과정은 길고도 험난하다. 디자인 컨설팅을 위해서는 크고 작은 기획 회의를 통해 이해 관계자들과 사업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사업 중간과 완료 후에도 최대한 광범위하게 관계자들을 모아 서비스 개선의 의미를 공유해야 한다. 정부 사업의 경우 프로젝트 기간을 정해 놓고 진행해 컨설팅 기간과 서로 맞지 않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따라서 프로젝트의 근본이 흔들리지 않게 하려면 디자인을 연차별로 계획하고 진행하자고 제안해야 한다. 컨설팅 주관 기관과 대상 기관의 입장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일의 효율과 장점을 잘 끄집어내는 것이 컨설턴트의 역할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1년 단위로 예산을 마감하는 관행을 깨고 몇 년을 두고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1∼2년간 연구·조사로 자료가 쌓이면 보다 근본적인 해법이 나오고 모두가 만족할 수 있다.
◆차분한 연구 축적과 디자인을 통한 문제 해결
다음은 지속가능한 디자인 문제 해결의 사례들이다. 필자의 첫 번째 컨설팅 과제였던 지하철 안내 체계 디자인은 충분한 연구 시간이 가져온 좋은 결과물이다. 이는 서울시민의 주요 이동 수단인 지하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시작된 ‘지하철 역사정보 안내체계 개선 사업’이다.
우리나라는 선진국들과 비교해도 교통수단으로서의 지하철 인프라가 잘돼 있지만, 정보 체계에는 문제점이 많았다. 정보 안내 체계가 일원화되지 않아 시민들이 길을 찾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안내 사인들이 무분별하게 부착돼 오히려 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이를 단 몇 달 만에 임기응변으로 해결하지 않고, 2014년에 사례를 충분히 조사하고 연구해 이듬해 적용할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서울시나 실무자 간 이견으로 어려움도 있었지만 논의 끝에 디자인 전문가들의 의견이 전적으로 반영됐다. 이 가이드라인은 서울시, 서울메트로 등 실제 실행 기관을 통해 점진적으로 적용되며 확산돼 가고 있다.
또 다른 사례로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개관을 앞두고 진행한 ‘디자인 문화예술 솜씨가게 디자인’이 있다. 2014년 DDP 주변에는 140여개의 거리 가게(노점상)가 있었다. 거리도 살리고 동시에 거리 가게도 살리는 상생 협력 방안에 대한 컨설팅이 필요했다.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거리 가게 상인들과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점 상인, 서울시, 서울디자인재단과 함께 거리 가게 모델 시범 운영에 대한 조사와 논의, 판매대 디자인, 제작 등에 대한 컨설팅을 진행했다. 실제 실물 제작까지 이어지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이해 관계자와의 의사소통이 디자인 과정의 99%라는 귀중한 경험을 얻었다.
마지막으로 도심창조 디자인 사업의 일환인 을지로 도심의 조명산업 활성화를 위한 ‘을지로, 라이트웨이’ 디자인 프로젝트다. 조명 산업의 메카인 을지로를 다시 활성화하기 위해 기획 과정에서 을지로 상인과 중구청, 서울디자인재단, 한국조명디자이너협회, 대학생들이 참여하는 크고 작은 아이디어 회의와 워크숍이 마련됐다. 힘을 합해 을지로의 멋을 살려 내며 조명 산업 활성화에 도전하는 도심 재생 프로젝트로 4년째 계속되고 있다. 2017년부터는 조명 상가와 디자이너가 협업해 을지로만의 조명 제품 ‘바이(By) 을지로’를 개발하고, 프랑스의 세계 최대 산업 박람회 ‘메종 앤드 오브제 파리’에 출품해 국내외 판로를 확장함으로써 그간의 유통 구조에 의존했던 을지로 조명 산업의 미래에 희망을 밝혔다.
올해는 ‘소상공인과 함께하는 DDP 디자인페어’를 통해 이 협업 프로세스를 더욱 확장해 나간다고 한다. 서울의 디자인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오래 끄는 게 해법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시민과의 소통 없이 좋은 디자인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김성곤 서울시립대 산업디자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