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보다 항상 4~5도는 낮다는 곳이다. 여름 더위 피하는 데 좋은 곳이라고나 할까. 병자호란 때 인조 임금이 이곳으로 몸을 피해 행궁에 머물며 47일 동안 항전을 했다. 1636년 12월이다. 청나라 군사 7만, 몽골 군사 3만, 한족 군사 2만 등 12만명의 대병력이 조선으로 들어온다. 강화로 들어가려 했지만 여의치 않아 이 산성으로 몸을 피했건만 끝내 한강 상류 나루 삼전도에 나아가 항복의 예를 치르고 말았다. 깎아지른 성벽으로 끝내 허물 수 없는 성벽이었으나 추위와 굶주림은 성벽보다 더 높은 어려움이었다. 그러나 남한산성은 조선보다 더 유서 깊은 곳이다. 백제 시조 온조대왕이 이 남한산성 위쪽 땅 하남 위례성에 새 도읍을 정했다. 지금도 남한산성에는 온조대왕 위패를 모신 사당 숭렬전이 있다. 그 후 고구려가 남진하면서 백제를 웅진으로 밀어내고 ‘중원’의 패권을 쥐었다. 신라의 진흥왕도 세력을 키워 이곳을 영토 삼았으니, 남한산성은 예부터 역사의 굴곡과 인연이 깊다.
성남 쪽에서 산성터널 속으로 뚫고 나가면 광주 땅이다. 산성 행궁은 주차장에서 불과 200∼300m 거리다. 한남루 지나 바로 행궁이다. 외행궁에서 내행궁으로, 그리고 나는 행궁 뒤뜰의 높은 느티나무를 올려다본다. 얼마나 됐을까. 역사의 흥망을 모두 조용히 지켜봤을 것 같다. 행궁 뒤쪽으로 돌아 숭렬전과 수어장대 갈림길까지 숲속을 천천히 거닐어 본다. 아름드리나무로 그윽한 흙길을 타박타박 걸으며 나라란 무엇이며 충의란 무엇인가 생각해 본다.
‘칼의 노래’를 쓴 소설가 김훈은 이순신을 충의의 인간으로만 그리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이순신의 내면은 적의로 가득한 세계를 향한 무서운 대결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왜적만 적인 것이 아니요, 원균의 무리도, 선조 임금조차도 그에게는 이 무상한 세계에서 자기 존재를 지탱하는 ‘전쟁’의 상대들이었다. 그는 뒤로 물러서는 군사를 쇠갈고리로 찍어내라며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삭막, 처절, 비정한 내면세계의 소유자로 이순신을 그렸다. 평론가 이경재는 이 김훈의 ‘칼의 노래’와 ‘남한산성’을 가리켜 스노비즘의 세계라 했는데, 그가 말하는 스노비즘은 상식의 스노비즘과 아주 닮았다. 본래 스노비즘은 통상 신분 낮은 사람이 귀족의 생활 양식을 동경해 그들의 복장과 행동 양식을 흉내 내는 데서 유래해 고상한 체, 잘난 체하는 태도를 가리키곤 한다. 그런데 이 평론가는 스노비즘을 그 통상적인 뜻 대신에 일본 평론가의 이야기를 곁들여 새로운 논의를 선보였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