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란 서강대 법학전문대 석좌교수, 손병옥 푸르덴셜생명 회장, 성시연 지휘자, 최연혜 전 한국철도공사장…. 이들의 공통점은 남성 위주의 조직에서 실력만으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한 여성 리더라는 점이다.
의료계엔 중앙대병원 소아외과 박귀원(70·여) 임상 석좌교수가 대표적이다. 박 교수는 이른바 ‘칼잡이’라 불리는 소아외과 분야의 유리천장을 깨뜨렸다. 1972년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후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소아외과에 발을 들여놓은 뒤 ‘서울대병원 첫 여자 외과의사’ ‘서울대병원 소아외과 전임의 1호’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그는 40여년 동안 수술 3만여건과 논문 300여편의 괄목할 만한 실적으로 소아외과 명의 반열에 올랐다. 6년 전 서울대병원에서 정년을 맞이했지만 중앙대병원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고희를 넘기고도 여전히 임상 현장을 지키고 있다.
지난 27일 서울 동작구 흑석동 중앙대병원 소아외과에서 만난 박 교수는 “제가 인터뷰 거리가 되냐?”면서도 “아픈 아이가 제 손을 거쳐 건강하게 성장하면 100년 가까운 삶을 살게 하는 것 아닌가. 보람이 작지 않다”며 웃어 보였다. 인터뷰 중간에 진료시간이 끝났는데도 아이를 안고 불쑥 방문한 부부에게도 친절을 보였다. 갓난아기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기자의 질문에 답했다.
―국가중앙병원 1호 여성 외과의다. 의료계의 유리천장을 깼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그간 주변의 반대와 편견으로 힘들었을 텐데.
“우리 집안에는 의사가 많다. 아버지는 대장항문 분야의 의사, 어머니는 산부인과 의사였다. 큰언니는 고려대 의대, 둘째 언니는 서울대 치대, 셋째 언니는 서울대 의대를 나왔다. 집안 식구가 대부분 의사이다 보니 저는 다른 일을 하고 싶었다. 법대에 가고 싶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법대에 가면 학비를 안 대주겠다고 해서 결국 의대에 입학했다. 진학하고도 본과 1학년 때까지는 후회했다. 그런데 2, 3학년 때 임상을 하다 보니 ‘환자를 돌보며 사회에 기여할 수 있어 보람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법대는 사람을 단죄하는 것이고 의사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지 않은가. 외과의사를 하고 싶었지만 당시 외과는 힘든 남성들의 영역이어서인지 여성들은 지원하지 않았다. 편견도 많았다. 서울대병원 위원회에서 까다로운 심사를 했고, 그 과정에서 교수들도 만류하거나 반대했다. ‘누가 여의사에게 수술을 받으려 하겠느냐’ ‘야간 당직을 할 수 있느냐’며 거부감을 드러냈다.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산부인과도 외과 분야니 산부인과가 어떻겠냐’고 달랬지만 제 고집대로 했다. 막상 소아외과 의사가 되고 나니 여태껏 여의사라는 이유로 담당 의사를 바꿔 달라는 환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언젠가 환자에게 ‘여자가 수술하는 게 겁 안 나느냐’고 물었다 ‘바느질을 더 잘하지 않느냐’고 했다. 응원해주는 이도 있어 힘이 났다. 체력적으로나 실력으로나 뒤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달려왔다.”
―소아외과 최고 여성명의로 업적이 남다르다는 평가를 받는데.
“소아외과 분야는 1978년 서울대병원에 처음 생겼다. 이듬해 제가 전임의(펠로)를 시작했다. 그때부터 소아외과의 의사로 40여년간 3만여건의 수술을 했다. 연구 논문은 300편 정도다. 한창 시절에는 수술을 1년에 600건, 많을 때는 1000건 이상을 했다. 어느 해는 1200건을 한 적도 있다. 2014년 중앙대병원으로 옮긴 뒤에도 약 800건을 했다. 한창 때는 기네스감이라고 언론에서 기사화하기도 했다. 요즘은 나보다 열심히 하는 의사들이 많아 잘 모르겠다. 아무튼 돌이켜보면 열심히 아이들을 돌본 것 같다.”
―40여년간 수많은 아이를 수술하고 진료했다. 특별히 기억에 남은 아이들이 소개한다면.
“20여년 전에 삼천포에서 온 초등학생 남자아이가 있었다. 항문이 없어 지역병원에서 인공항문 수술을 했는데 수술이 잘못돼 배 윗부분에 볼록 튀어나온 대장 주머니를 달고 다녔다. 농사짓는 어머니에게 ‘서울에 한 번만 데려가 달라’고 아이가 졸라서 올라왔다. 수술해 새 항문을 만들어 줬다. 대장 주머니가 없어졌다고 좋아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성인이 된 뒤에도 간간히 소식을 전해왔다. 제주에서 온 남자아이도 잊히지 않는다. 설사를 하도 해서 검사해보니 대장·소장 전체의 신경이 없고 장루가 있어 뱃속 변이 줄줄 샜다. 그때마다 창자를 꺼내 수술했는데 제대로 되지 않았다. 주변에서 ‘더 살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 절망감이 들긴 했으나 포기하지 않고 몇 차례 수술을 더 하자 장이 제대로 막히고 염증도 나았다. 저 스스로 신기했다. 이때 ‘끝날 때 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교훈을 얻었다. 어떤 아이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곳 중앙대병원에서 옛 여아환자를 20년 만에 재회하기도 했다. 광주에서 올라온 여자아이였는데, 담도낭종(간에서 만들어진 담도가 늘어나 기능을 못 하는 병)이 있어 복통과 구토를 반복해 제가 담관낭종 절제술을 집도했다. 이후 이 아이가 자라서 이곳 소아병동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인연이 묘하다.”
―출산율 하락으로 비상이다. 아이들을 돌보는 입장에서 어찌 보는가.
“다른 얘기 같지만, 산전 초음파가 엉뚱하게 쓰이는 게 안타깝다. 태아의 이상을 확인해서 잘 치료해 낳으라는 것인데, 과거 초음파 기계가 나쁠 때는 잘 안 보이는데 기계가 좋다 보니, 그것도 3D로 보니 조금만 이상이 있어 보여도 낙태를 한다. 초음파에 이상이 있어도 수술만 하면 멀쩡하게 성장하는데 안타깝다. 소아외과의로서 이런 걸 바로잡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초음파를 통해 태아에서 낭종이나 심장의 구멍 등 무언가 발견했을 때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국가적인 기구가 필요하다. 아이와 산모의 건강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해줄 수 있는 책임 있는 전문가들의 자문기구를 말한다. 섣부른 판단으로 귀중한 생명을 없애는 일은 없어야 한다. 정부도 아이를 낳으라고 하기에 앞서 국가와 보육과 교육을 모두 책임지는 차원에서 지원 확대가 필요하다. 이제 고등학교까지 의무교육도 한다고 하는데 사교육비는 더 어려운 문제다. 이런 근원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출산율 제고는 난망하다.”
―정년을 하고 중앙대병원으로 옮길 때도 의료계에선 화제였다.
“원래는 쉬려고 했다. 그런데 김성덕 중앙대병원장님의 간곡한 요청이 있었다.(김 원장은 박 교수의 서울대 의대 1년 선배이자 전임의 동기다) 중앙대병원은 규모도 큰데 소아외과 전문인력이 없다. ‘쉬는 것을 몇 년 미루고 아이들을 돌봐 달라’고 부탁하는 바람에 덤으로 더 일하고 있다. 6년째 수술과 진료를 하고 있다. 서울대에서 국가 돈으로 공부하고 그 덕에 명성을 얻은 입장에서 건강이 허락하는 데도 그 지식을 사회에 환원하지 않고 떠나면 안 된다는 생각도 했다. 언젠가 병원을 떠나더라도 소아환자의 외과수술을 담당할 수 있는 후배를 양성하고 가야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다.”
―후배 의료인에 당부의 말이 있다면.
“주변에서 저를 개척자로 얘기하지만 지금도 소아외과는 여전히 힘들어 기피한다. 소아외과 환자들은 시한폭탄과 같다. 늘 긴장해야 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봐야 하고 상태가 수시로 변한다. 신경 써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게다가 돈이 안 되니 일부는 유방외과 등 다른 과로 개업하거나 포기하는 이도 있다. 힘들다고 여전히 기피하니 국내 소아외과 분야 여의사는 손에 꼽을 정도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많이 하지 않으니 오히려 빛이 날 수 있다. 조금만 잘해도 눈에 들어온다. 사명감을 가지고 하다 보면 보람이 클 뿐 아니라 주변에서 인정을 받기 마련이다.”
―향후 계획이나 꿈은.
“오랫동안 몸담아온 봉사단체가 있다. 불교계의 약사, 의료인, 자원봉사자 모임인 무량감로회다. 쪽방촌을 돌며 무료진료를 하고 있다. 네팔, 캄보디아 등 저개발국 진료봉사도 한다. 이 일 역시 보람이 크다. 오랫동안 회장을 해오다 1월에 넘겨주었지만 봉사활동은 여생 동안 계속할 생각이다. 이곳에서 조금 더 아이들을 돌보다 병원을 떠나면 지금 살고 있는 춘천에서 무료 진료소를 운영할 생각을 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의사로 주변의 은혜를 입었다. 그런 만큼 앞으로는 세상에 갚고 베풀며 살 생각이다.”
박태해 선임기자 pth1228@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