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법 철폐.” “홍콩을 도와달라.” “우리를 죽이지 말라.”
범죄인 인도법안 철폐를 요구하는 현수막과 팻말을 든 수만명의 홍콩인이 16일 도심으로 쏟아져 나왔다. 정부 청사로 향하는 시민들은 모두 검은 옷을 입고, 법안 철폐를 요구했다. 빅토리아 공원을 출발해 청사가 있는 약 4㎞ 거리는 발 디딜 틈이 없을 만큼 행렬이 이어졌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홍콩 도심이 검은 바다로 변했다”고 묘사했다. 인터넷과 유튜브에도 실시간 중계가 계속됐고, “감동으로 눈물이 난다”, “우리는 폭동이 아니다” 등의 댓글이 계속 올라왔다.
홍콩 정부가 지난 15일 ‘범죄인 인도법안’ 추진을 보류키로 했음에도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100만 시위’로 표출된 홍콩 시민의 저항에 정부는 전날 법안을 보류한다며 ‘백기’를 들었다. 중국 정부도 홍콩 정부의 결정을 존중한다고 밝혔다.
홍콩 정부가 법안 추진 동력을 되살리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자연스럽게 소멸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하지만 홍콩 반환 이래 일국양제(一國兩制)를 둘러싼 중국과 홍콩 간 갈등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다는 지적이다.
케리 람 홍콩 행정장관은 이날 오후 낸 성명에서 “정부 업무에 부족함이 있었음을 인정한다”며 “홍콩 사회에 커다란 모순과 분쟁이 나타나게 하고, 많은 시민을 실망시키고 가슴 아프게 한 점에 대해서 사과한다”고 밝혔다. 케리 람 행정장관이 시민들에게 직접사과 메시지를 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겅솽(耿爽) 중국 외교부 대변인도 담화에서 “홍콩 정부 결정을 존중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일국양제와 고도의 자치로 홍콩 주민은 자유와 권리를 보장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앞서 시위대는 이날 오전 집회를 강행했다. 법안 재추진 가능성을 경계하는 차원에서다. 다만 17일 예고한 파업은 철회키로 하는 등 홍콩 사태는 봉합 국면으로 접어드는 분위기다.
이번 사태가 급반전된 데에는 여러 정치적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홍콩 시민의 대규모 저항과 사태 장기화가 홍콩 정부의 결정을 압박했을 가능성이 있다. 중국 정부로서는 일본 오사카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담판이 예정된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부담을 가급적 줄이려는 판단도 깔렸던 것으로 해석된다. 미국과 홍콩이라는 또 하나의 전선이 만들어진다면 시 주석으로서는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어서다.
실제로 빈과일보 등 홍콩 현지언론은 한정(韓正)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이 홍콩과 인접한 선전(深?)에 내려와 대책 회의를 하고, 법안 연기를 지시했다는 소문을 전하기도 했다. 이는 이번 홍콩 정부의 법안 보류 결정에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깊숙이 개입하고 있을 것이라는 정황을 뒷받침하고 있다. 범죄인 인도법안은 소멸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현 입법회 의원 임기가 내년 7월 끝나기 때문에 이 기간 내 법안이 재추진되지 않으면 법안은 자연스럽게 소멸한다.
베이징=이우승 특파원 wsle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