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연구 개척자’ 노명호 서울대 명예교수 / 조선초기 고려역사 편찬 ‘이상론’ 치우쳐 / 주자학적 이념 실천 ‘사대명분론’ 매몰 / 황제국 제도 제후국으로 낮춰서 기술 / 한국사학계 현재까지 왜곡 못 벗어나 / 세종, 역사적 선례확보 ‘直書원칙’ 추구 / 改書 주장하며 버티는 중신들과 논쟁 / 태조·태종 등 선대 왕의 묘호 되살려 / 독립국 상징·왕권의 권위 강화 목적 / 결국 대명관계 의식 제한적 直書 적용 / 고려 황제제도 원자료 후대 복원 기여 / 부분적 사실 수록 ‘고려사’ 대단한 업적 / 현재 기준으로 보면 역사 왜곡 아쉬움
“시대에 뒤처진 역사인식은 사회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원인이 됩니다. 사회를 따라가지 못하는 역사인식은 공감의 원천과 구심점을 제공할 수 없어요. 특히 어느 시대에나 이념에 경도되면 사실과 현실을 소홀히 합니다. 독선적인 이상론이지요.”
고려사 연구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구축해 온 노명호 서울대 명예교수의 말이다.
고려사 연구의 개척자로 통하는 노명호 서울대 명예교수는 기자와 만나 차분히 우리 역사를 되짚으면서, 왜곡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제원 기자
노학자의 언급은 마치 최근 벌어진 ‘역사 논쟁’을 지적한 말처럼 들렸다. 일부 ‘운동권’ 논리에 휘둘린 지금 정치인들을 꾸짖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념에 매몰된 ‘독선적인 이상론’은 특히 조선 초기 고려사 편찬에서 두드러졌다.
이로 인해 당시 고려사는 주자학 이념에 경도된 나머지 상당 부분 왜곡되었다. 지금의 후손들은 그 ‘왜곡된 역사’를 사실로 알고 있다. 노 명예교수는 평생 고려사에 천착해 온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이라고 했다. 그는 최근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사료적 특성’(지식산업사)을 출간해 고려사의 왜곡된 부분을 바로잡고자 했다.
지난 20일 2시간여 이어진 인터뷰를 통해 노 명예교수의 학문적 성과를 간단하게나마 신문지면에 옮겼다. 다음은 주요 문답이다.
-고려사에 대한 그간의 인식을 간략히 평가한다면.
“한국사학계는 아직 고려사의 역사 왜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고려시대 주류 사상인 ‘천하다원론’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다. 대신 최승로나 김부식 등은 유교적 사대이념에 기반한 ‘화이론’을 주도적 사상으로 부각했고, 묘청 일파 등의 국수적인 ‘고려중심론’을 부수적으로 파악하였을 뿐이다.”
-고려의 주류사상이라는 ‘천하다원론’은 무엇인가.
“천하다원론은 고려가 대륙의 강대국들의 세력권(천하)과 공존하는, 독자적 천하(세력권)를 갖는 황제국이라는 세계관이다. 유연하면서도 자주와 평화를 추구하는 사상이다. 국익을 위해 강대국들에 형식적 사대관계를 맺기도 하고, 때로는 단호히 군사적으로 맞서기도 했다. 동아시아의 국제적 선진문화 도입에 개방적이면서도 토속문화의 장점도 발전시키는 문화정책을 낳은 사상이었다. 태조 왕건이 후대의 임금들에게 내린 훈요(訓要)에도 들어간 고려의 국시가 된 천하관인데, 후손에 이르러 묻혀 있다.”
-그러면 화이론이란.
“화이론은 당·송 같은 나라가 온 천하의 유일한 황제국인 중화이며, 고려 등 다른 나라들은 이(夷)로서 제후국이라는 세계관이다. 유교적 이념의 실천으로 평화를 달성한다는 이상론에 경도되었다. 당시 국제관계 현실 파악이 한쪽으로 치우친 결과를 낳았다. 토속문화는 모두 천박하다고 단정한 반면, 당·송의 문화는 숭상하며 고려 현실에 맞지 않는 정책을 급진적으로 도입하도록 만든 사상이다. 이 같은 당시 고려시대에 대한 역사인식은 고려인들의 치열한 고민·도전·문제의식을 탈색·탈락시키고, 그 뼈대조차 변형시켜 놓은 결과가 되었다. 훗날 조선사가 현실을 도외시한 이상론에 흐르는 한 원인이 되었고 후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조선 초기 고려 역사 편찬은 이런 배경에서 시작되었는가.
“조선 건국 후 처음 편찬된 ‘고려국사’(1395)는 주자학 이념의 사대명분론에 따라 고려의 황제제도를 모두 제후제도(왕)로 고쳐 서술했다. 사실을 왜곡한 것이다. 특히 제후제도로 고칠 경우 쓸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다수 발생하면서, 내용은 빈약해졌다. 이를 깨달은 왕은 세종이었다. 세종은 이념·대명관계의 제약 속에 저질러진 사서의 역사 왜곡을 바로잡고 빈약한 내용을 해결하기 위해 편찬에 나섰다.”
-세종은 역사 인식에서 특별한 임금이었나.
“그렇다. 세종이 추구한 고려사 편찬 방침은 황제제도의 사실을 여러 제약적 환경 속에서도 가능한 것은 사실대로 서술하는 직서(直書) 원칙이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동기가 있었다. 하나는 정치적 동기다. ‘태조, 태종’ 등을 칭하는 묘호의 역사적 선례를, 고려 역사 속에 되살리는 것이었다. 황제제도의 일부이기도 한 ‘조·종’ 묘호의 사용은 조선 임금이 명 황제 직할령의 제후들과 다르며, 조선이 독립국임을 상징하는 의미다. 왕권의 권위를 강화하는 목적도 있었다.
다른 하나는 제대로 된 고려시대 사서 편찬이었다. 당시 새로운 법을 만들 때나 정치적 조치를 내릴 때, 임금은 물론 각 관청에서 역사적 선례를 참고할 풍부한 내용의 역사책이 절실했다.”
-세종의 고려사 편찬 방침은 어떻게 이뤄졌나.
“먼저 정도전 등이 나서서 황제제도를 제후제도로 바꾸어 개서(改書)한 ‘고려국사’를, 묘호·관제 등에 한하여 사실대로 기록하는 작업을 추진했다. 개서가 옳다며 완강하게 버티는 중신들과 논쟁이 격렬했다. ‘조·종’ 묘호의 선례가 수록된 역사책은 세종 6년(1424)에야 ‘수교고려사’로 편찬되었다. 그러나 보다 풍부한 내용의 역사책을 편찬하는 작업은 기존의 책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자료수집부터 세밀하게 다시 하는 것이었다. 세종 13년에 시작된 두 번째 편찬작업으로 내용이 대폭 확충된 ‘고려사전문’(1442)이 만들어졌으나 문제가 발견되어 다시 보완에 들어갔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문종 원년(1451)에 ‘고려사’로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후 ‘수교고려사’를 조금 손보아 간행한 것이 ‘고려사절요’(1452)이다.”
-편찬 과정에서 직서와 개서 논쟁이 불붙게 된 경위를 설명하면.
“고려의 황제제도를 제후제도로 고쳐 서술해야 한다는, 개서를 주장한 것은 변계량을 위시한 다수의 신료였다. 그들은 신흥 강대국 명이 문제 삼을 위험성을 걱정하였다. 또한 그들은 주자학 이념에 따른 사대명분론에 기울어져 있었다. 사대명분론에 어긋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라도 삭제하거나 변개하는 것을 당연시했다.
그러나 세종은 달랐다. 고려 황제제도 중 대명관계에서 민감하지 않은 사실들은 사실대로 서술하는 제한적 직서를 주장했다. 명분에 어긋나더라도 별도로 후세에 사실대로 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세종과 중신들은 정면 충돌했다. 후에 세종이 직서하지 않는 범위를 더 확대하도록 양보하였지만, 변계량 등은 전면적 개서를 끝까지 주장했다.”
-오늘날 입장에서 세종의 태도를 풀이한다면.
“세종의 제한적 직서는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면 역사가 왜곡된, 아쉬운 점이 많다. 하지만, 당시 주자학 이념에 심하게 편중된 다수 중신의 개서 주장에 외롭게 맞서며, 어렵사리 사실을 수록한 고려사를 남긴 것은 대단한 업적이다. 특히 고려사 편찬에서 일관되게 제한적 직서 원칙을 적용했다. 이 때문에 훗날 고려 황제제도 등 중요한 사실들이 서술된 원자료의 문장들을 복원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당시 중신들의 고려사 왜곡의 가장 큰 동기는 무엇인가.
”조선초 역사 편찬자들이 자신들이 굳게 믿는 주자학적 정치이념을 합리화하는 방향으로, 지나치게 편중된 역사 편찬을 추구했다. 이러한 역사 편찬은 대단히 광범위한 역사 왜곡을 만들어냈다. 후대에 바로잡아야 할 중요한 문제들을 남기고 있다.“
-고구려 계승을 표방한 고려의 역사가 지금 한국사에서 갖는 의미는.
“고구려 유민의식을 갖는 주민을 주축으로 건국한 고려가, 백제 유민의식을 갖는 주민의 후백제와 신라를 합쳐 통일을 이룩했다. 신라의 (고구려와 백제) 무력 통합 후, 사회융합을 이루지 못하고 후삼국으로 분열되었던 옛 삼국의 백성들이 다시 외형적 통일을 본 것이다. 그후 고려의 사회융합 정책은 성과를 거뒀다. 13세기 말 이후에는 삼국유민의식은 사라지고 단일 국가의 백성이라는 집단의식이 확고해졌다. 이러한 사회융합의 결과는 그대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졌다. 왕조만 바뀌었지(역성혁명), 국가를 구성한 다른 요소들은 그대로 이어졌다. 관리들을 포함한 백성과 영토가 그대로였고, 법제와 습속 등도 개혁을 거치며 조선으로 이어졌다."
-미래 역사학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1980년대 이후 오랫동안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 대한 사료연구는 거의 정체되어 왔다. 이는 고려시대 연구에 큰 장애 요인이 되었다. 앞으로 사료연구는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한다. 보다 정밀하게 되어야 미래 역사연구의 발전을 뒷받침할 수 있다. 정년 퇴임한 노학자의 각고의 노력은 고려사 연구를 몇단계 높인 큰 업적으로 평가받아야 할 것 같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노명호 교수는 누구인가… △서울대 대학원 국사학과 박사 취득 △중앙대 부교수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1990~2017) △한국역사학회 회장(2009) △제19회 한국미술저작출판상 수상(2016) △서울대 인문대학 명예교수(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