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미칼럼] ‘우리끼리 외교’의 대가

북핵·미중 패권다툼 체스판 된 한반도 / 외교·안보 무능이 낳은 총체적 난맥상

북측 인사들과 여러 차례 만났던 지인이 던진 질문이다. “그들은 ‘적들로부터 장군을 심장처럼 지키겠다’고 하는데 그 적이 누구라고 생각하나.”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절 얘기다. ‘철천지 원수’로 여기는 미국 아닌가. “중국이다. 전쟁을 겪지않은 전후세대가 군·당 주요 포스트에 진출해있다. 그들에게는 중국이 자신들의 체제를 위협한다고 생각한다.” 의외의 답변으로 들렸다. 노무현정부 통일부 장관을 맡았던 정동영 의원은 당시 김정일에게서 두 번이나 “우리는 중국을 믿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중국이 한국과 수교를 맺은 사건은 선대(김일성)부터 내려온 배신이다.

황정미 편집인

김정일 사후 김정은 세습체제가 시작됐지만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김정은을 만나주지 않았다. 한마디로 ‘세자 책봉’을 기피한 거다. 시진핑이 김정은을 처음 만난 건 지난해 3월 남북,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시점에서다. 김정은 집권 7년 만이다. 지난 20일에는 시 주석이 평양 땅을 밟았다. “‘우리에게는 위대한 친선이 있네, 우리에게는 공동의 이상이 있네, 우리의 단결은 더없이 굳건하여라’ 중조친선의 노래가 전해주듯이 국제정세가 어떻게 변하든 우리 두 나라는 전통적인 중조친선을 훌륭히 계승하고…” 시 주석의 전례 없는 노동신문 기고에 화답하듯 김정은은 1박2일간 그를 밀착 동행하며 극진히 예우했다.

김정은을 ‘골칫덩어리’로 바라보던 시 주석의 ‘중조친선 예찬가’는 현실 외교의 민낯을 보여준다. 3대에 걸쳐 중국에 대한 배신감을 키운 김정은의 ‘황제급 예우’도 마찬가지다. 서로의 어깨가 절실한 탓이다. 미·중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확실한 우군임을 과시하며 미국을 압박한다. ‘제2의 항미원조(抗美援朝) 항전’ 선포라는 해석이 나올 만하다. 69년 전 북·중이 힘을 합쳐 미국, 남한과 싸웠던 6.25전쟁을 연상케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반도는 갈라져 있고 열강의 각축은 요란하다. 총알과 대포가 오가진 않아도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 전쟁은 그에 못지않게 치열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6년 10월 송민순 외교장관을 내정한 뒤 “내가 보니 우리나라는 외교장관을 부총리로 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고 했다고 한다. 송 전 장관은 자신의 책에서 “4년 가까이 국정을 운영해본 판단에서 나온 생각으로 보였다”고 적었다. 2차 북핵 파동을 겪으면서 남북 관계, 외교의 난맥과 정세의 엄중함을 절감했을 것이다. 이후로도 북한은 도발을 일삼더니 ‘핵단추’ 운운하며 한반도를 전쟁 위기로까지 내몰았다. 역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이 두 차례나 열렸지만 북핵 국면은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 미·중 패권 다툼은 한반도를 체스판 삼아 장기전으로 흐르고 있다.

외교부총리가 아니라 외교대통령이 나서 수습해야 할 판이다. 그런데 우리 외교, 안보 수뇌부는 참담한 수준이다. 북한 목선 한 척이 군이 사수해야 할 북방한계선을 넘어 삼척항에 입항하는 동안 깜깜이였던 것도 모자라 상황을 은폐, 축소하는 데 급급했다. 경계 실패의 책임을 엄중하게 물어야 할 청와대가 거짓 발표에 관여했다는 의혹마저 짙다. 사실이라면 군통수권자의 영(令)을 스스로 무너뜨린 꼴이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존재감을 찾을 수 없는 ‘그림자’ 신세다. 외교 사령탑이라던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은 동맹국인 미국 측 파트너와 소통이 안 된다는 말이 나온 지 오래다. 김연철 통일부 장관은 대선캠프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정세현 전 장관으로부터 “지금 축사나 하고 다닐 때냐”는 면박을 당했다.

이번주 다자외교 무대인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에서 의장국 일본과 정상회담 일정은 끝내 무산됐다. 최악 수준인 한·일관계는 대북 외교, 한·미동맹 전선의 ‘구멍’이다. 그간 정부가 총력전을 펼친 대상이 있긴 하다. 북한이다. 정부는 김정은을 대화 테이블에 앉힌 공을 자랑하고 싶을지 모르나 그 역시 김정은의 전략적 선택이었을 뿐이다. 한반도 운전자론은 슬그머니 사라지고 장기판의 졸(卒) 취급을 받는 현실이 기막히다. ‘우리끼리 외교’의 대가(代價) 아닌가.

 

황정미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