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필리핀 폐플라스틱 관련 논의를 하는 자리에서 현지에서 소각·매립하면 어떻겠느냐고 필리핀에 제안했습니다. 필리핀 관계자를 포함해 참석자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죠.”
국제환경단체 아이펜(IPEN)의 조 디간지 선임과학기술고문은 25일 오후 서울 종로구 환경보건시민센터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한국 정부가 필리핀에 불법 폐기물 현지처리를 제안했다가 ‘퇴짜’를 맞았다고 전했다. 디간지는 20년 가까이 바젤·스톡홀름협약 등에 옵저버 자격으로 참여해 온 화학·폐기물 분야 전문가다.
환경부는 지난 13일 필리핀에서 민다나오섬에 아직 남아 있는 5177t의 폐플라스틱 처리방안을 논의하고 국내로 재반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협의 문건에는 ‘한국 정부는 다음 세 가지 옵션을 제안한다’면서 ‘필리핀에서 매립 혹은 소각, 이후 (한국이) 처리비용 지불’이라고 적혀 있다.
디간지 고문은 “(국가 간 폐기물 이동을 규제하는) 바젤협약에서는 불법폐기물의 반송이 기본원칙”이라며 “이를 거스른 제안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매우 충격받았다(completely shocked)”고 말했다. 이어 “(한국처럼 필리핀에 불법 폐기물을 수출한) 캐나다가 비슷한 제안을 했다가 거절당했는데 한국이 같은 제안을 해 거부감이 컸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환경부는 “다른 대안을 논의하는 것 자체가 바젤협약 위반은 아니다”라면서 “결과적으로 필리핀 정부가 원치 않아 우리나라로 폐기물을 가져오기로 했는데 이를 문제삼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필리핀 불법수출은 폐플라스틱의 국가 간 이동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일부일 뿐이다. 지난해부터 중국이 수입을 중단하면서 갈 곳 잃은 선진국의 폐기물은 동남아로 모여들었다. 우리나라도 일본·미국 등지에서 적잖은 양의 폐플라스틱을 수입한다.
디간지 고문은 “미국은 바젤 협약국이 아니라 한국에 폐기물을 보낼 수 없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끼리는 수출입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예외조항 때문에 가능하다”고 했다.
지난 5월 바젤협약 당사국은 유해폐기물 목록에 폐플라스틱을 올리기로 합의했다. 지금까지 폐플라스틱 거래는 신고제였지만, 2021년부터 바젤협약 당사국 간 플라스틱 폐기물을 거래할 땐 반드시 수입국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그는 “바젤협약이 폐플라스틱을 유해폐기물 목록에 올린 것은 결국 각국의 재활용 인프라를 강화하고 플라스틱 발생량을 줄이자는 취지”라며 “플라스틱 생산은 석유 사용량을 늘리고, 온실가스 배출로도 이어지는 만큼 결국 플라스틱 사용 자체를 줄여야 한다”고 했다.
이어 1995년 바젤협약 개정안도 한국이 비준하길 원한다고 했다. 당시 바젤협약은 선진국에서 개도국으로 유해폐기물의 수출입을 완전히 금지하는 개정안을 채택했다. 그러나 발효되기 위해선 두 나라의 비준을 더 받아야 한다. 한국은 개정안을 비준하지 않은 나라 중 하나다.
글·사진=윤지로 기자 kornyap@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