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배로 시작된 한국의 수중발굴…서해에서 절정 [강구열의 문화재 썰전]

복원돼 전시 중인 신안선. 

어딘가 어색하긴 하지만 한국 수중고고학은 중국의 고선박을 발굴하면서 시작됐습니다. 1976~1984년 진행된 ‘신안선’ 발굴입니다. 한국의 고선박으로 오해하기 쉬운 이름이지만 발굴장소인 전남 신안의 지명을 따온 것일 뿐 중국 원대에 활동한 무역선입니다. 발굴 당시만 해도 수중발굴 인력, 장비가 없다시피 해 작업은 해군에 절대적으로 의지해 진행됐습니다. 

 

10년 가까이 고군분투가 이어지는 가운데 바다 속 유물을 노린 절도범들도 들끓었나 봅니다. 문화재청과 경찰은 지난 13일 도굴된 신안선 유물을 은닉하고 있다 팔려던 A씨를 붙잡은 사실을 공개했습니다. 압수한 유물은 모두 57점. 그간 전시회 등을 통해 익히 보아온 신안선 도자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절도 사건까지 포함해 여러가지 이유로 신안선 발굴은 시작되고 40년 넘게 지난 지금도 종종 회자되는 큰 사건입니다. 한국 수중발굴의 최초임과 동시에 지금도 최대 규모의 발굴로 꼽힌다는 점에서 그럴 겁니다.

 

신안선 발굴의 몇 가지 요소가 이후의 수중발굴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은 흥미롭습니다. 문화재청이 공식집계한 수중발굴은 신안선 이후 2018년 태안마도해역 8차 발굴까지 25번. 한국 수중발굴의 두드러진 특징을 키워드 세 개로 살펴보겠습니다.  

 

#고선박-수중발굴의 또렷한 풍경 

 

바다 속에서 촬영된 고선박

수중발굴의 가장 또렷한 풍경은 역시 고선박입니다. 고선박 자체가 가지는 아우라도 크지만 운항 당시 싣고 있던 막대한 화물이 같이 나온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1984년 인양된 신안선은 지금까지도 발굴된 고선박 중 가장 큽니다. 남아 있는 선체는 길이 24.2m, 너비 9.15m, 깊이 1.98m입니다. 본래는 길이 약 34m, 최대 폭 약 11m, 최대 깊이 약 3.7m이고 중량은 200t 정도로 추정되는데, 100여 명을 태울 수 있는 규모입니다. 복원된 신안선이 전남 목포의 국립해양유물전시관에 전시돼 있습니다. 세월이 더한 카리스마까지 갖고 있어 700년 전의 배인가 싶을 정도로 당당합니다. 

 

태안선에 발굴된 도자기 유물

신안선에서 나온 유물은 금속품, 목공예품, 향신료, 약재, 석제품, 유리제품 등 2만3500여 점에 달합니다. 이 중 상당수는 도굴범들이 훔쳤던 것과 비슷한 중국 도자기입니다. 무게가 28t에 이르는 800만개의 동전도 나왔습니다. 단단하고 잘 썩지 않아서 고급 가구나 불상을 만드는 데 사용된 자단목도 눈에 띄는 유물입니다. 

 

지금까지 신안선 포함, 14척의 고선박이 발견됐습니다.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수는 엄청난 양의 유물과 함께 발견됐습니다. 1983∼1984년 완도선 발굴에서 도자기 3만여 점이, 2007∼2008년 태안선 발굴에서는 고려청자 등 2만5000여 점이 나왔습니다. 충남 태안의 마도에서는 네 척의 배가 확인됐는데, 각각 적게는 300여 점, 많게는 900여 점의 유물을 품고 있었습니다. 

 

고선박이 한 척을 빼고는 모두 고려시대의 배라는 점은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신안선은 우리나라 것은 아니지만 고려의 바다를 오갔던 배이죠. 2015년에 확인된 마도4호선이 유일한 조선의 배입니다. 오래된 고려의 배가 조선의 배보다 적어야 자연스러운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가 않은 겁니다. 전문가들에게 그 이유를 여러 번 물어봤지만 명쾌한 대답을 듣지는 못했습니다. 

 

#서해-수중발굴의 메카, 태안

 

험하기로 유명했던 충남 태안의 바다

신안선 발굴해역은 서해입니다. 공식적으로는 전남 신안군 증도면 방축리로 정리돼 있죠. 삼면의 바다에 수많은 배들이 오갔을 것이나 제주 신창리를 제외하면 수중발굴의 전부가 서해에서 이뤄졌습니다. 주요 발굴해역으로는 전북 군산, 경기도 안산, 인천 옹진 등이 있고, 전남 진도는 약간 애매하기 하지만 서남해안이라고 보면 되겠죠.

 

수중발굴의 메카는 충남 태안입니다. 태안선을 시작으로 마도 1·2·3·4호선이 발굴돼 엄청난 성과를 거뒀습니다. 태안의 바다는 옛날부터 험하기로 유명했습니다. 여기를 피해가기 위해 고려말, 조선초에 운하를 파려는 시도가 여러번 있었을 정도입니다. 험한 바다가 부른 당시의 불행이 수 백년이 지난 지금 수중발굴의 빛나는 성과로 이어지고 있다는 건 시간이 만들어낸 아이러니같기도 합니다. 

 

서해에 발굴 성과가 집중되는 이유는 뭘까요? 서해가 남해, 동해에 비해 바닷길로서의 기능이 크긴 했습니다. 수도인 개성, 한양이 서쪽으로 치우쳐 있어 지방에서 올라오는 조운 등이 서해를 주로 이용했던 겁니다. 

 

또 하나 중요한 요인이 남해, 동해와 다른 서해의 수중환경입니다. 펄의 존재가 절대적입니다.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화물이나 배 위에 펄이 내려앉으면서 조류에 휩쓸려 사라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 나무와 같은 유기물을 분해시키는 미생물의 공격을 막아줍니다. 수 백년 전 침몰한 고려의 배들이 지금껏 흔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인 셈이죠. 남해, 동해의 바다 속은 암반이나 모래가 많습니다. 남해에는 펄이 있기는 하지만 모래 성분이 많아 서해의 그것과 같은 역할을 하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남해, 동해에서 발굴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닙니다. 남해에서는 해전 유적, 유물을 찾기 위한 시도가 여러번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량의 총통, 자기류 등을 건져올렸을 뿐 뚜렷한 성과를 낸 적이 없습니다.          

 

#목간-역사를 증언하는 또 다른 열쇠

 

바다 속에서 발견된 목간

신안선은 그 성격이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습니다. 이 배는 1323년 일본 도후쿠사(東福寺) 등이 주문한 무역품을 싣고 있었습니다. 출발지는 중국 경원항, 목적지는 일본 하카타항이었습니다.

 

무려 700년 전, 바다를 오간 수많은 배들 중 하나일 뿐인 신안선의 출발지와 목적지, 운항 시기에다 화물의 성격까지 파악이 된다는 게 신기하지 않나요? 

 

신안선에서 나온 목간 덕분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화물 운송장의 역할을 했던 물건입니다. 운송시기, 수신인, 화물 내용 등을 깎아만든 나무에 휘갈겨 써놓았습니다. 신안선에서는 300여점의 목간이 나왔습니다. 그 중에 ‘至治三年’(지치삼년), ‘東福寺公物’(동복사공물)이라고 적은 게 있습니다. ‘지치’는 원나라 연호로 지치삼년은 1323년을 가리킵니다. 동복사공물은 화물의 성격을 증언합니다. 

 

목간이 이래서 중요합니다. 목간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유물입니다. 아무렇게나 깎은 나무에다 휘갈겨 쓴 글자가 전부죠. 하지만 당대에 작성된 문자자료라는 점에서 그것이 지닌 가치는 초라한 행색에 비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목간은 태안선에서 2007년 9월 15일 처음 34점이 발견됐습니다. 이후 마도1호선에서 73점, 마도2호선에서 47점, 마도3호선에서 35점, 마도4호선에서 63점이 나왔습니다. 목간이 담고 있는 정보는 중대합니다. 마도 2호선 목간을 통해 고려청자 매병이 당대에 ‘樽’(준)이라 불렸으며 꿀, 참기름 등을 담는 용기로도 사용되었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마도3호선에서는 당대 최고권력자인 무인집정 김준에게 보는 젓갈을 담은 화물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목간이 나와 한국사의 이색적인 장면 하나를 추가했습니다. 해당 선박의 운항시기가 명확해지면서 배에 실린 수만 점 도자기의 성격이 분명해져 도자사 연구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