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해 전 오래된 사진 한 장이 인터넷에서 인기를 끌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과학 학술회의 중 하나인 ‘솔베이 콘퍼런스’에 모인 과학자들의 단체 기념사진으로, 1927년에 찍은 것이다. 이 사진이 유명해진 이유는 사진에 등장하는 총 29명 중에서 노벨상을 받았거나, 훗날 받게 될 사람이 무려 17명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맨 앞줄에 앉아 있는 사람들 중에는 막스 플랑크, 마리 퀴리(한국에는 ‘퀴리 부인’으로 알려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등이 있었고, 둘째줄과 맨 뒷줄에는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닐스 보어, 오귀스트 피카르처럼 이공계생이라면 과학책에서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인물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이렇게 과학계의 엄청난 별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사진을 찍은 예를 찾기가 쉽지 않아서 이 사진이 유명해졌을 뿐,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서 사진 찍는 일 자체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도 단체로 기념사진을 찍는다. 우리는 학교나 직장에서 함께 지내는 사람들과, 혹은 동호회나 콘퍼런스에서 만난 사람들과 줄지어 앉거나 서서 단체사진을 찍는 일이 흔하다.
단체사진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등장인물이 실제로 한자리에 모여야 한다.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한 그림 안에 넣는 예는 역사적으로 많았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이 실제로 한자리에 모인 적이 없는데 화가가 그려넣었다면 상상화에 불과하다. 대표적인 예가 르네상스 화가 라파엘이 그린 ‘아테네 학당’이다.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을 비롯해 에피쿠로스, 피타고라스, 페리클레스 등 그리스 철학, 사상을 대표하는 인물 20명가량을 한 화면에 담은 이 그림은 언뜻 단체초상처럼 보인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이 서로 시대가 달라서 한자리에 모여서 포즈를 취했을 리 만무하기 때문에 라파엘의 상상일 뿐 단체초상이라 부르지 않는다.
둘째, 그들이 실제로 한자리에 모였다고 해도 화가나 사진기가 그 자리에 없었으면 그 역시 상상화에 불과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은 예수와 열두 명의 제자들이 등장하지만, 그림이 그려진 건 그들이 모인 후 1500년이나 지난 후이므로 단체초상, 혹은 단체사진이 아니다. 화가는 만찬장을 직접 보고 그리지 않았다.
셋째, ‘단체’초상이 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복수의 인물들이 모인 것이 아닌, 같은 단체에 속한 동등한 지위를 가진 사람들의 모습이어야 한다. 17세기 스페인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작품으로 유명한 ‘라스메니나스(시녀들)’는 어린 왕녀를 중심으로 시녀들이 늘어서 있고, 거울에는 왕과 왕비도 등장하지만 아무도 단체초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 그림은 주인공이 분명하고, 나머지 인물은 조연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많은 그림들이 그려졌지만, 위의 단순한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그림을 찾기 쉽지 않다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그건 우리가 현대를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어서일지 모른다. 인류는 오래도록 눈앞에 있는 것보다는 상상하는 것을 그렸고, 그림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평등한 지위를 가지게 된 것은 비교적 근래의 일이다.
그렇다면 비슷한 지위를 가진 복수의 인물들이 화가나 카메라 앞에 앉아 있는 단체초상이 처음 등장한 것은 언제일까? 미술사가들에 따르면 그 시기를 지금의 네덜란드 지역에서 렘브란트와 프란스 할스가 활동하던 17세기다. 흔히 ‘네덜란드의 황금시대’라고 불리는 17세기는 네덜란드가 스페인을 상대로 독립을 쟁취하던 시기인 동시에, 부유한 시민들(부르주아 계급)이 당시에 보기 드문 민주주의를 이룩해낸 시점이기도 하다. 그들이 만들어낸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함께 탄생한 것이 바로 네덜란드인들의 단체초상이다.
네덜란드 특유의 단체초상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렘브란트의 ‘포목상조합 이사들’이라는 작품이다. 포목장사로 부자가 된 그림 속 인물들은 함께 모여서 (지금의 기념사진과 같은) 기념초상을 남기게 된 이유는 뭘까?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이 우리가 왜 기념사진을 찍는지 상상해 보면 된다. 어떤 의미에서 이 그림이 그려진 17세기는 우리가 사는 21세기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자본주의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왕족의 힘은 기울고 부르주아 계급이 이끄는 민주주의가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림 속 인물들은 각자 자신의 사업으로 풍요롭게 살고 있지만, 포목업이라는 업계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조합(길드) 일에 특별히 시간과 노력을 할애하고 있었다. 오늘날 어느 정도 먹고살 만해진 사업가나 직장인들이 따로 시간을 내어 비영리단체나 자선단체에 가입해 활동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하루하루 간신히 입에 풀칠하는 사람들과 달리, 이들은 공익을 위해, 자신의 만족을 위해 시간을 낼 수 있는 사람들이고, 자신이 그런 위치에 있음을 뿌듯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소속된 단체의 모임에서 반드시 기념사진을 찍는다. 렘브란트 그림 속 이사들도 똑같은 생각을 한 것이다. 다만 당시에는 사진기가 아직 없었기 때문에 렘브란트라는 걸출한 화가를 부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궁금한 것이 하나 있다. 기념사진과 달리 기념초상화를 그리는 데에는 제법 큰 돈이 들어간다. 그렇다면 그 돈은 누가 지불했을까? (힌트: 네덜란드 사람들을 영어로 ‘더치’라고 부른다). 그렇다. 사진에 등장한 사람들이 그림 제작에 들어가는 비용을 각자 나눠서 지불했다. 물론 ‘더치 페이(going Dutch)’라는 표현은 네덜란드와 경쟁관계에 있던 영국인들이 다소 비하적으로 만들어낸 표현이기는 하지만, 집단 내에서 구성원들이 동등한 대우를 받고 그에 맞춰 각자가 동등한 의무와 책임을 지는 네덜란드 시민들의 관습은 주변국 사람들의 눈에 몹시 특이해 보였다고 한다.
네덜란드 사람들이 얼마나 계산에 철저했느냐 하면,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림 비용을 부담하기는 했지만, 화면 중앙에 앉아서 중심인물처럼 보이는 사람은 주변부에 서 있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비용을 부담했다고 전해진다. 사실 생각해 보면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다. 사람들과 모여 찍은 사진을 꺼내보면 대개 연배나 지위가 가장 높은 사람들이 대개 가운데 앉아 있고, 그들이 그날 저녁 식사비용이나 찻값을 냈을 가능성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비록 모임 내에서 중요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그들은 넓은 의미에서 동등한 위치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같은 일을 하는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이 모임을 갖고, 그걸 기념하기 위해 찍는 단체초상화는 그렇게 이미 근대에 들어선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사진기보다 먼저 탄생한 것이다. 같은 시기 네덜란드에서 원시형태의 사진기인 ‘카메라 옵스쿠라’를 이용해 그린 그림이 큰 인기를 끌었다는 사실은 어쩌면 완전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
박상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