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 중국 상하이 훙커우공원. 정장 차림의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과 핵심 임원 20여명이 공원 중앙 한 사당 앞에 멈췄다. 1932년 4월29일 일본군의 상하이 점령 전승 경축식에서 윤봉길 의사가 군 수뇌부를 향해 폭탄을 투척한 현장이다.
“훌륭한 분에겐 절을 해야 해!”
◆재계에 부는 조직문화 혁신의 바람
재계의 시도는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하다. 한 그룹 정보팀 관계자는 “4대그룹만 해도 경쟁이 붙었다. 서로의 해법에 윗선들 관심이 비상하다”고 전했다.
전날 현대차그룹은 1만 연구개발(R&D) 조직을 대수술했다. 크게 5개 조직이 브랜드와 차종, 차급과 무관하게 맡은 일만 수행하던 방식을 버리고 새롭게 ‘헤쳐모인’ 3개 조직이 이를테면 프로젝트별로 더 큰 재량을 갖는 방식이다. ‘까라면 까는’ 군대식 기업문화에 비견돼온 현대차그룹은 올 초 정 부회장이 “조직의 생각하는 방식, 일하는 방식에서 변화와 혁신을 추진하겠다”고 선언한 이후 여러 조치를 단행했다. 출퇴근 및 점심시간 유연화, 복장자율화, 타운홀미팅, 상시채용 전환, 임원 직급 및 인사제도 개편 등이다. 양재동 사옥만 해도 대학 캠퍼스를 방불케 한다. 정장 차림은 방문자로 봐도 무방할 정도다. 한 직원은 “다른 회사는 몰라도 현대차는 못할 것으로 생각했던 변화”라고 말했다.
SK도 환골탈태하고 있다. 최태원 회장의 경영 화두인 ‘딥 체인지’에 ‘사회적 가치’와 ‘구성원의 행복’ 철학이 맞물려 ‘일하는 방식 혁신(일방혁)’으로 이어졌다. 생존에 방점을 찍는 다수 기업들과 달리 행복과 워라밸을 위해 스스로 혁신하라는 취지다. SK는 그 해답을 ‘공간’에서 찾았다. 구글 본사를 연상케 하는 ‘공유오피스’ 도입이 대표적이다. 초반만 해도 ‘원하는 자리에 앉아 일하는 게 혁신이냐’, ‘부작용도 클 것’이란 의구심이 있었지만 어느새 지위를 떠나 만족한 모습이다. 한 계열사 팀장은 “업무 집중도와 자율성이 둘다 오른 걸 체감한다. 워라밸도 절로 지켜진다”고 말했다.
중견기업들도 예외가 아니다. 교원그룹은 최근 직급체계를 매니저, 연구원으로 일원화하고 복장자율화를 도입했다. 워킹맘·워킹대디를 위해 출퇴근 시간 규정도 없앴다. 대명그룹은 용모, 복장을 자율에 맡겨 반바지는 물론 문신, 헤나까지도 허용한다. 대교그룹도 출퇴근 시간을 직원들이 자율적으로 정하고 있다.
◆“한국적 성공 모델 만들어야”
그간 혁신 노력은 성과를 거두고 있을까. ‘대한상의·맥킨지 한국 기업문화 및 조직 건강도 2차 진단 보고서(2018)’는 혁신이 얼마나 힘든 과제인지 잘 보여준다. 대기업 직장인 2000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 47%는 최근 2년간 기업문화 개선 여부에 변화가 없거나 되레 나빠졌다고 답했다. 응답자의 82%는 캠페인성 활동을 경험했다고 밝혔고, 제도적 변화 등 혁신을 체감했다는 답변은 21%에 그쳤다.
심층 인터뷰에서도 직원들은 회사 △리더십 △성과관리 제도와 문화 △업무분장과 관리 △방향성에서 중하∼최하 점수를 줬다. ‘대안이 있는 것인지 불안하다.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고 다 끌고 간다’는 비판이 주류를 이뤘다. 최고경영자(CEO)들은 ‘구성원들이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시도를 했으면 좋겠는데,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그런 문화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수직=악, 수평=선’이란 이분법, 서구에 대한 무분별한 환상도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넷플릭스 사례는 대표적이다. 이 회사는 최근 근무시간, 휴가, 출장비 관련 규정을 없앴다. 자율성을 최고로 보장하되 가성비, 효율 등 성과에 대한 피드백(보상, 문책)은 반드시 한다는 전제다. 부정이 적발되면 ‘원스트라이크아웃’이다. 국내에 적용할 수 있을까. 자유는 가능하나 해고는 어렵다.
기업정보분석업체 한국CXO연구소 오일성 소장은 “서구 것을 가져와 적용한다고 혁신이 아니다”며 “좋든 나쁘든 우리에게는 유교문화가 있다. 내 것의 좋은 걸 지키면서 한국만의, 우리 회사만의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정답은 조직 내부에 다 있다. 구성원들은 답을 안다”며 “CEO부터 모든 구성원이 같이 공감해야 개혁, 혁신이 되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조현일 기자 cona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