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러일전쟁 직전 인천 앞바다에 수장된 바랴크함의 깃발을 대여하려는 러시아 정부의 노력과 성의는 그야말로 대단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잊은 지 오래된 전쟁이지만 러시아에선 전투에 참여했던 군인들을 지금도 영웅적으로 평가하며, 현지 해군사에 빛나는 무용담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인천시립박물관이 보관 중이던 러시아 옛 군함 바랴크함의 기(旗)가 바닷물에서 건져진 지 106년만인 2010년 고향땅으로 나들이를 떠났다. 러시아의 요청으로 중앙해군박물관에 2010∼2014년 임대가 이뤄졌다. 일련의 국제교류 과정에 앞장선 박한섭 부평구시설관리공단 이사장이 지난 5월 러시아 정부로부터 외교공로훈장을 받은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화제다.
박 이사장은 11일 세계일보와 인터뷰에서 1904년 러일전쟁의 시작이자 2월 8일 인천에서 벌어졌던 ‘제물포 해전’을 소개했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러시아 바랴크함 장병들은 일본 순양함의 집중포격을 받았고, 전멸 위기에서 군함을 자폭해 침몰시켰다. 일본에 전리품으로 넘겨주지 않기 위한 결행이었다고 한다. 일본 해군은 잔해로부터 군함에 내걸렸던 가로 257㎝, 세로 200㎝ 크기의 깃발을 수거해 ‘인천향토관(현 시립박물관)’에 보관했다고 한다.
제물포 해전의 자료를 오래도록 찾던 러시아는 2002년 인천시립박물관 수장고 깊숙한 곳에 바랴크함 깃발이 보관 중이란 정보를 접했고, 국제적 대여를 끈질지게 요구했다. 이때 러시아 대사를 비롯해 많은 인력들은 박 이사장이 당시 원장으로 있던 인천문화발전연구원을 창구로 삼아 시립박물관과 대화에 나섰다. 그렇지만 지역사회에서 유물 반출과 향후 회수가 어려울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이때 박 이사장이 필요한 각종 행정절차를 비롯해 내·외부 의견 조율을 시작했다. 그는 “국제법과 국제법상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보험을 들어 만일의 ‘회수 불가’ 상황에 철저히 대비한다는 것으로 우려를 말끔히 해소시켰다”고 전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2010년 11월 한국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기간 중 당시 송영길 인천시장과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이 만났고 결국 바랴크함 깃발은 대여가 확정됐다.
2010년과 2012년 두 차례 임대로 바랴크함 깃발은 러시아 전역에 순회 전시됐고, 그 공로가 인정된 박 이사장에게는 2009년 7월 러시아 대통령 훈장에 이어 올해 5월 30일 외교공로훈장이 재차 수여됐다. 지금 인천은 러시아 관광객과 학생 및 정치인들도 찾는 국제적 명소로 거듭났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 크론슈타트(Kronstadt)엔 ‘인천광장’이 조성돼 있다. 주한 러시아 대사 등은 러일전쟁이 일어났던 2월 8일이면 매년 인천항 연안부두에서 ‘바랴크·코레예츠 순양함 수병 추모식’을 열고 있다.
2002년에 박 이사장을 통해 맺어진 인연으로 러일전쟁 100주년이 되던 2004년 2월 인천 연안부두에 추모비가 건립되기도 했다. 제물포 해전에서 전사한 장병들을 기리기 위한 취지다. 박 이사장은 “러시아는 100여년 전 우리 땅에 와서 숨진 장병들을 국가적 영웅으로 추대하며 후대에서도 챙기는 세심함까지 보인다”면서 “한반도의 운명을 가른 러일전쟁에 대해서 정작 우리가 무심했던 게 아닌가 싶다. 이제라도 후세들이 역사를 바로 알 수 있도록 전달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박 이사장은 2002년 7월부터 2010년 9월까지 8년간 몸담았던 인천문화발전연구원을 떠나 인천지방노동위원회 조정심판위원, 한국갈등해결센터 전문위원 등을 거쳐 2017년 11월 부평구시설관리공단 제8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인천=강승훈 기자 shkang@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