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11일 병역 기피로 국내 입국이 금지됐던 가수 유승준(43·미국명 스티브 승준 유)씨에게 내려진 비자발급 거부가 위법하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놓으면서 유씨가 17년 만에 한국 땅을 밟을 길이 열렸다. 과거 법무부의 입국금지결정을 이유로 유씨의 비자발급을 거부하는 것은 재량권 남용이라는 게 대법원의 판단이다.
대법원은 “총영사관이 다른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오로지 13년 7개월 전에 입국금지결정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사증발급 거부처분을 한 것이 적법하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의 입국금지결정은 ‘처분’이 아니라 대외적 구속력이 없는 ‘지시’에 해당하기 때문에 입국금지결정을 따랐다고 해서 사증발급 거부처분의 적법성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취지다. 재판부는 유씨의 비자발급 거부 과정에서 LA 총영사관 측이 재량권을 전혀 행사하지 않은 만큼 이 같은 처분은 위법하다고 봤다. 2002년 법무부는 유씨에 대해 입국금지결정을 내렸는데, 영사관 측이 당시 결정을 이유로 아무런 판단을 하지 않은 채 비자발급을 거부한 것은 재량권 남용이라는 것이다.
재판부는 출입국관리법상 외국인이 한국에서 금고 이상 형을 선고받아 강제퇴거명령을 하는 경우에도 원칙적으로 입국금지 제한은 5년간인 점, 재외동포법이 병역기피 목적으로 외국국적을 얻고 한국국적을 상실한 경우에도 38세가 되면 재외동포 체류자격 부여를 제한할 수 없다고 규정한 점 등을 들어 LA 총영사관이 거부처분 당시 이 같은 사정들을 고려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또 사증발급 불허를 문서상이 아닌 유씨 부친에게 유선상으로 통보한 데 대해서도 행정절차법을 위반해 위법하다고 봤다.
앞서 1·2심은 2015년 9월 주로스앤젤레스 총영사관의 비자발급 거부 통보가 절차상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당시 LA 총영사관은 유씨 부친에게 유선으로 “유씨가 입국규제 대상자에 해당해 비자발급이 불허됐다”며 여권과 비자발급 신청서를 되돌려줬다. 1·2심 재판부는 “외국에 소재한 재외공관에서 이루어지는 사증발급 관련 사무의 경우 외국인에 대한 송달상의 어려움 등을 이유로 행정절차법상의 규정을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다”며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1990년대 큰 대중적 인기를 끌었던 유씨는 2001년 10월 수핵탈출증을 이유로 공익근무요원(4급) 판정을 받았고 2001년 11월 소집통지를 받은 후 2002년 1월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면서 병역을 면제받았다. 이후 유씨는 LA 총영사관에 재외동포 비자 발급을 신청했지만 당시 병무청은 국군 장병의 사기 저하가 우려된다며 법무부 장관에게 입국금지를 요청했고 법무부는 유씨의 입국을 막았다.
대법원의 이번 결정 취지에 따라 조만간 항소심에서 LA총영사관의 비자 발급 거부 처분을 취소할 경우, LA총영사관은 법원에서 지적한 하자를 보완해 유씨 비자 발급 신청에 대해 다시 처분해야 한다. 이날 병무청은 대법원 결정에 대해 “앞으로도 국적 변경을 통한 병역 회피 사례가 있을 수 있는 만큼 이를 막기 위한 실효성 있는 대책을 계속 마련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이번 대법원 판결을 놓고 많은 시민들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다. 시민들은 이번 결정이 병역 기피를 목적으로 한 행태에 대한 면죄부를 줬다는 점에서 잘못된 선례를 남길 수 있다는 우려를 드러냈다. 3년 전 전역했다는 김모(26)씨는 “유씨가 입국할 경우, 이후 병역기피문제가 사회에서 약하게 다뤄질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김건호·염유섭·이강진·이정우 기자 scoop3126@sge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