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울 마포구 연남동 소재 게스트하우스에서 일하는 칠레 출신 엘리자베스(33·여)가 제일 좋아하는 한국 음식은 삼겹살이다. 그녀가 삼겹살에 빠지게 된 이유는 ‘쌈을 만드는 재미’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마늘을 비롯해 고기와 함께 넣을 재료들을 엄선해 상추에 싼 후 쌈장에 찍는 행위 자체가 그녀에게는 큰 즐거움이다. 골라 먹는 재미가 쏠쏠한 한국만의 반찬 문화도 ‘신세계’다. 식문화 여행을 즐기다가 결국 한국에 정착하게 됐다는 그녀는 자신을 한국문화 마니아라고 소개했다.
#2. 최근 러시아 사할린으로 출장을 다녀온 안모(30)씨는 현지 한식당 여기저기에서 매운 해물 뚝배기 국물을 들이켜는 현지인들을 보고 두 눈을 의심했다. 안씨는 “나도 매운데 러시아인들에게 너무 맵지 않냐”고 식당 주인에게 묻자, “매운 메뉴들이 인기다. 더욱더 맵게 만들어 달라는 사람들도 많다”는 답이 돌아왔다. 식당에 앉아 신기한 듯 현지인들이 주문하는 메뉴들을 지켜보니 김치찌개, 매운탕 등 매운 메뉴가 대부분이었다. 숙소 주변의 슈퍼마켓에서는 한국 음식 도시락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다.
인기 한국 드라마를 넷플릭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고, K팝의 인기가 치솟는 요즘, 한류 열풍에 힘입어 한식의 인기도 고공 상승 중이다. 한국에 머무는 외국인들을 인터뷰해 보면 한국문화에 관심을 갖다 보니 한국 음식이 먹고 싶어졌다는 대답이 돌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컨대 철 지난 한국 드라마부터 한국 예능까지 섭렵한다는 아일랜드인 션(26·학생)은 “드라마나 예능에서 연예인들이 맛있게 먹는 음식들을 꼭 한 번씩 따라 맛보는 것 같다”며 “요즘 좋아하는 음식은 ‘소떡소떡’(소시지와 떡을 차례로 꽂아 만든 꼬치)”이라고 서툰 한국어로 친절히 알려주기까지 했다.
영국 런던에서 한식당 ‘아랑’을 운영하는 이현재(가명·40)씨는 “최근 5년 동안 한국 음식을 접하는 것 자체를 뭔가 ‘트렌디한 것’이라고 여기는 현지인들이 부쩍 늘었다”며 “영국인 손님 중에서는 확실히 젊은 층이 압도적인데, 타 문화에 대한 호기심이 많고 해외여행 경험이 풍부한 세대가 새로운 식문화에 도전하는 것 자체를 굉장히 쿨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김태희 경희대학교 외식경영학과 교수는 “기본적으로 그 나라에 관한 동경이 생겨야만 그 나라 음식을 접하고 싶은 마음도 생길 수 있다”며 “최근 한류 열풍이 거세진 데다 ‘장에 좋은 발효 음식’에 관심이 높아진 것이 맞물리면서 한식 세계화에 불을 지핀 것 같다”고 설명했다.
◆한류업은 한식 전성기, 각국 입맛 고려는 남은 과제
최근 한식 호감도는 물론이고 한식을 접해본 경험이 있는 외국인의 비율이 급증세다. 한식 인기 상승에 세계 각국에서 한식당 수도 빠르게 늘고 있다. 식품영양·조리 전문가들은 이런 상승세를 지속해서 이끌어가려면 각국의 식문화와 선호하는 맛을 반영한 융통성 있는 요리법을 찾고 표준화하는 노력이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난해 농림축산식품부 산하 기관인 한식진흥원이 글로벌 한식 취식 경험자를 대상으로 벌인 한식 만족도 조사에서 93.9%가 만족한다고 응답했다. 이는 전년(83.2%)보다 10.7%포인트 급등한 수치다. 특히 일본의 경우 전년 대비 만족도가 27.8%포인트나 상승했다. 식문화가 유사한 아시아권은 물론 프랑스(97.3%)와 이탈리아(95.7%)를 비롯한 유럽권, 브라질(96.6%), 두바이(96.3%)에서의 만족도도 대체로 높았다.
외국인들이 한국 관광을 결심한 주요 이유로도 한식 호감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관광공사가 지난해 ‘외래 관광객들이 방한 기간 중 가장 만족한 활동’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가장 높은 점수를 얻은 항목이 ‘식도락 관광’(29.3%)이었다. 이는 유적지 방문(7.5%), 전통문화 체험(2.5%), 놀이공원(1.9%)의 만족도 등이 한 자릿수를 맴돌고 있는 것과 대비된다. 지난해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의 한국 문화콘텐츠 인기도 조사에서도 한식이 43.2%로 뷰티(40.1%), 패션(35.6%)보다 높았다. 전통 장류 등의 수출도 눈에 띄게 늘었다. 2010년 한국 고추장·간장·된장의 수출액은 3500만달러 수준이었지만 지난해는 5300만달러를 기록해 51.4% 가까이 증가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 같은 인기에도 아직 마냥 박수만 치기에는 이르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여전히 한식 하면 지나치게 맵다는 인식이 강해 마니아층은 즐기지만 일본의 스시처럼 대중성을 높이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각국에서 특별히 선호하는 소스와 맛, 식감 등을 세심하게 고려해 나라별 맞춤형 레시피를 개발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까닭이다.
한식진흥원의 지원을 통해 포르투갈 관저에서 셰프로 활동하고 있는 배소은(26·여)씨는 “현지에서 일할수록 무작정 전통 한식을 내세우면서 (한식이) 대중화하길 바라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체감한다”며 “일례로 포르투갈 사람들이 단맛을 워낙 좋아해 같은 요리를 만들 때도 단맛을 더 강하게 넣고, 식재료도 현지에서 선호하는 것을 이용하기 시작했는데 사람들이 더 좋아하는 것을 확연히 느꼈다”며 현지인 입맛 분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나라별로 선호하는 음식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해외에서 식당을 열 경우 메뉴 선정 시 반영할 수도 있고 입맛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김성희 경상대 식품영양학과 교수는 “탕류가 발달한 아시아권에서는 전골·찌개류 등이 인기를 끌 수 있는 반면 고기 문화가 강한 북미는 불고기 종류, 최근 웰빙 음식에 관심이 특히 고조되고 있는 유럽권에서는 비빔밥 등의 선호가 높을 것으로 예상된다”며 “현재 너무 많은 한식당이 백화점식 메뉴판으로 특색이 없는 데다 한식당의 질적인 저하 문제까지 불거지고 있어 이를 해결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지난해 진행된 ‘글로벌 한식소비자 조사 결과’에 따르면 북미권인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갈비 선호도가 30.7%로 높은 반면 중국 베이징(13.4%), 상하이(13.5%), 타이베이(3.9%) 등 동아시아에서의 선호도는 현저히 떨어졌다. 찌개류의 경우 탕 문화가 있는 태국(29.1%) 등 아시아권의 선호도는 높았지만 유럽은 평균 15% 수준으로 저조했다.
영국 런던에서 한식당을 운영하는 이씨는 “유럽에서는 한국과 달리 플레이팅에 많은 신경을 쓴다. 예쁘게 차려진 음식이 고급 음식이라는 인식이 강해 (나도) 그런 면을 보완하려고 노력해왔다”며 “현지인들이 싫어하는 마늘은 일절 사용하지 않고 매운맛을 꺼리는 손님에게는 간장소스로 요리해주는 등 꾸준히 선택권을 넓힌 것이 식당이 인기를 끌게 된 주된 이유인 것 같다”고 언급했다.
◆타국인이 운영하는 ‘무늬만 한식당’, 제도 보완 및 관리 시급
한식 열풍이 일고 있는 해외에서 유명 셰프들과 한식진흥 단체들의 가장 큰 고민은 우후죽순으로 늘어나는 질 낮은 한식당의 증가세다. 프랑스에서 유명 한식당을 운영하는 A씨는 “주변에 새로 생긴 식당들을 살펴보면 한국인이 아예 없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폐업률도 높다”며 “주로 중국인 등 타 아시아권 사람들이 운영하는 식당이 많은데 자칫 한국 음식에 대한 이미지가 떨어질까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한식진흥원은 중국인을 비롯한 현지인들의 한식당 개업 자체를 제한할 수 없으나 현지 한인들의 피해 최소화를 위해 정부 차원의 해외 한식당 인증제도 확산이 시급하다고 호소했다. ‘우수 한식당 지정 제도 도입’ 등의 내용이 담긴 ‘한식진흥법’이 지난해 발의됐지만 여전히 대기 중이다.
한식진흥원 관계자는 “현지를 직접 시찰해 보면 한국식당으로 등록해 놓고 다른 나라 음식을 판다든지 업종을 변경하는 경우가 수두룩하다”며 “이 같은 사례들 때문에 정확한 통계 작성에도 애를 먹고 있다”고 토로했다.
식당마다 천차만별인 요리법을 어느 정도 표준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한식당을 하는 B씨는 “식당마다 같은 음식인데도 맛이 천지 차이라 손님들이 의아하게 생각할 때가 있다. 이 점이 일본의 스시 식당 등과 극명하게 차이가 나는 부분”이라며 “맛이 같을 수는 없지만 각종 장류 등을 만드는 과정만이라도 모범적인 표준안을 제공해야 한식에 실망하는 경우를 줄일 수 있다”고 제안했다.
◆“정통한식 가르칠 ‘한국의 르코르동블루’ 설립 서둘러야”
외식조리·식품영양학계 전문가들은 지금의 한식 인기가 대중화 단계에 이르려면 몇 가지 보완책이 필요하다는 데 입을 모은다. 한국으로 음식 유학을 오는 외국인 셰프들이 늘어나는 만큼 이들을 교육할 전문기관 설립, K팝 등과 연계한 영리한 홍보 전략 등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박미영 한국음식문화재단 이사장은 수준 높은 한식 요리법을 가르칠 전문기관 설립이 절실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 이사장은 “최근 한식 요리법을 전문적으로 배우고 싶어 국내로 유학을 오는 외국인이 급격히 늘지만 전문적인 교육기관이 부재해 막상 전문가들을 찾아 전전하는 실정”이라며 “외국인 셰프들이 정통 한식을 배운 후 해외에서 활약할 수 있도록 한국의 르코르동블루(120년 전통의 유명 프랑스요리학교) 설립이 시급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발효음식, 채소를 활용한 다채로운 건강음식의 장점을 홍보할 필요성도 제기됐다. 한식진흥원 조사에 따르면 외국인들이 재경험하길 원하는 음식 대부분은 삼겹살·소고기구이·불고기 등 고기류에 집중돼 있다. 채소요리의 매력과 장점이 저평가돼온 만큼 이를 부각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정혜경 호서대 식품영양학과 교수는 “최근 외식 트렌드를 살펴보면 세계적으로 웰빙 음식 관심 고조와 함께 환경 문제가 부상하면서 채식 인기의 상승세가 뚜렷하다”며 “한국의 다양한 나물 요리를 각국 사람들의 취향을 고려한 소스와 함께 제공한다면 향후 채소요리 선호도도 높아질 것”이라고 제안했다.
김성희 경상대 식품영양학과 교수는 발효음식의 우수성을 효과적으로 홍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위장병이 늘면서 세계적으로 위장에 좋은 음식 찾기에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며 “발효음식이 위장 건강에 미치는 긍정적인 효과를 다룬 학술논문이 쏟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음식에 관한 관심은 그 나라 문화에 갖는 관심에서 비롯하는 만큼 한식 홍보에 K팝 등 한국문화를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동원대 항공서비스과 유용재 교수는 가령 “한국 연예인들이 글로벌 투어를 할 때 정부가 한식을 알리면 매우 큰 시너지 효과를 누릴 것”이라며 “BTS(방탄소년단)를 비롯한 글로벌 스타의 한식 사랑, 즐겨 먹는 메뉴 등을 소개하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유명 인플루언서들을 활용한다면 한식의 우수성 등을 성공적으로 홍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김라윤 기자 ry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