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도를 넘는 수출규제로 양국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한일 양국의 첫 관련 실무자 회동이 이뤄졌다. 일본은 '국장급 협의'를 바라보고 방일한 한국에 '과장급 설명회'로 격을 낮추고 파트너들을 싸늘하게 맞았다는 후문이다. 만남 목적도 서로 해법을 찾는 게 아닌, 우리가 문제점을 말하면 자기들은 듣는다는 식으로 정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무역 보복 카드를 꺼낸 자민당 정권의 자세 변화를 쉬이 기대하긴 어렵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그럴 것 같았으면 파괴력 큰 수출통제에 애초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라면 비록 실무자급이지만 만나서 문제를 짚은 것만도 우리로선 일정 부분 의미가 있다. 보복이 보복을 부르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피하려면 각급 접촉 채널은 열어두고 상황 악화를 막는 것이 낫다는 분석도 나왔다.
일본의 경제보복이 가져오는 악영향을 설명하고, 미 행정부와 의회의 이해를 구하는 것도 절실해 청와대·정부 인사들의 잇따른 방미 행보는 당연한 처사로 이해된다. 정부가 최근 세계무역기구(WTO) 이사회에 일본의 수출규제를 긴급 안건으로 올린 것도 같은 맥락에서 평가할 수 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의 중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북한 비핵화와 대중국 전략 운용 및 역내 도전과제 대응을 위해 한일 양국의 협조가 모두 필요한 미국이다.
한일 갈등 장기화가 우려되면서 의회의 초당적 외교와 민간의 지혜에 대한 요구도 커지고 있다. 국회가 이달 말 대표단의 방일을 결정한 것은 잘한 일이다. 뻔히 보이는 국익이 걸린 사안에 여야가 따로여선 안 된다.
산업계도 정부에 불만이 있을 수 있겠으나 가능한 선에서 정부와 보조를 맞춰 수입선 다변화 등 함께 노력할 부분은 같이하고, 시민사회도 외교 전선에 동력을 보태야 한다.
일본 정부가 우리나라를 겨냥한 수출 규제가 장기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반도체 산업과 관련한 3개 품목의 수출 규제가 당장은 한국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이지만, 한·일 갈등이 지속하면서 규제 품목이 확대되면 우리나라 제조업 전반이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로 인한 파급력이 글로벌 공급망으로 확산할 우려가 있어 일본 정부가 기존 입장을 고수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다고 뉴스1이 보도했다.
◆日 수출규제 장기화 가능성…"제조업 전반 타격 입을 듯"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는 12일 '일본의 수출 제한 조치 분석과 전망'을 주제로 한 현안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날 일본의 수출규제 현황과 전망에 관한 발표를 맡은 김규판 KIEP 선진경제실장은 일본 정부가 이달 18일까지 설치를 요구한 강제징용 관련 제3국 중재위원회 설치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한·일 갈등이 장기화할 것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현재 일본은 강제징용 배상 문제와 한국의 전략물자수출 관리 부실 의혹 등을 빌미로 △플리오린 폴리이미드 △포토레지스트 △고순도 불화수소 등 3개 품목에 대한 수출 규제 조치를 시작한 상태다.
김 실장은 "일본 정부가 올해 1월부터 한일청구권 협정에 의거한 정부 간 협의를 요청했지만 우리 정부가 응하지 않자 이달 18일을 기한으로 제3국 중재위원회 설치를 요청한 상태"라며 "18일까지 우리 정부의 태도 변화가 없을 경우 수출 규제 사태가 장기화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경제적 문제가 아닌 정치적 문제를 가지고 일본 정부가 수출 규제 조치를 시작한 만큼 우리 정부도 쉽게 물러날 수는 없다는 판단이다.
이재영 KIEP 원장도 "역사 문제는 우리가 양보하기 어렵다. 역사 문제에 있어 가해자인 일본 정부가 피해자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하는 것은 (정부도) 용납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수입한 고순도 불화수소를 북한에 유출했다는 일본 정부의 주장도 한·일 무역 갈등의 단기 해결을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지목됐다.
김 실장은 "우리나라가 일본에서 수입하는 고순도 불화수소가 북한으로 유출됐다는 심증을 가지고 일본 정부가 공격을 하고 있다"며 "안보상의 문제가 있다는 주장인데 우리 정부도 양보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고 설명했다.
일본 정부가 이미 반도체·디스플레이 관련 3개 품목의 한국 수출을 규제한 상태지만 KIEP는 우리나라 기업에 즉각적인 영향은 미미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큰 폭으로 떨어질 가능성도 작다는 분석이다.
일본 기업에 대한 의존도가 92%에 달하는 레지스트의 경우 수출 규제 품목으로 지정된 EUV(극자외선)용 포토레지스트는 우리 대기업들의 메모리 반도체 생산과는 큰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메모리 반도체 생산에 쓰이는 ArF용 포토레지스트는 정상적으로 수입되고 있는 상태다.
다만 EUV 포토레지스트가 삼성전자가 개발 중인 시스템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품목이어서 수출 규제가 장기화할 경우 한국 반도체 산업의 중장기적 성장 잠재력을 위협할 가능성이 높다.
◆韓 반도체 산업 타격 생각보다 적을수도…경쟁국가 거액의 투자 쉽지 않아
이날 토론회에서는 일본 수출 규제 장기화로 우리 반도체 산업이 피해를 입더라도 경쟁국가들이 단기적으로 경쟁력을 갖추기는 어렵다는 분석도 나왔다.
반도체 생산라인의 증설이나 신규투자에는 천문한적 자금이 필요한데 세계적인 불확실성이 높은 상황에서 기업이 쉽게 투자를 결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3개 품목을 대상으로 한 일본 수출 규제 조치의 영향은 미미할 것으로 보이지만 내달 중 일본 정부가 우리나라를 화이트 국가 리스트(안보상 우호국가)에서 제외할 경우 규제 품목이 늘어나면서 제조업 전반의 타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김 실장은 "화이트 국가 배제 조치는 수출 규제 품목에 대한 규정이 포괄적이고 자의적이어서 불확실성이 크다"며 "현재 거론되는 수출 규제 품목으로는 군사전용이 가능한 첨단소재와 차량용 2차 이온전지 등 전자부품이 유력하다. 일부 공작기계도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화이트 국가 리스트 제외가 현실화할 경우 대일 의존도가 높은 제조업 분야에 미치는 영향이 파괴적일 것"이라며 "대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KIEP는 일본이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과 전략물자 수출 관리 등을 빌미로 우리나라에 대한 수출 규제 입장을 고수하고 있지만 세계무역기구(WTO) 협정상 '자충수'를 둔 것이라고 평가했다.
WTO는 회원국이 수출 허가 등을 통해 수출을 금지·제한하지 못하도록 의무화(GATT 제11조 제1항)했는데 일본의 이번 3개 품목 수출 규제가 이에 위반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일본이 우리나라를 화이트 국가에서 제외한다면 최혜국대우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볼 수 있기도 하다. 최혜국대우의무란 동종 상품의 수출입에 있어서 WTO 회원국간 차별을 금지하는 것이다.
이천기 KIEP 부연구위원은 "일본이 한국과 유사한 상황에 놓여있는 국가와는 화이트 리스트를 유지하면서 우리나라만 제외한다면 최혜국대우의무를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일본은 국가 안보 차원에서 수출 규제를 실시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만약 이달 18일을 기점으로 수출 규제 품목 확대가 이뤄지면 사실상 강제징용에 대한 보복조치로 실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우리로서 매우 유리하다"고 덧붙였다.
◆"장기화시 일본도 우리에게 제품 팔 수 없는 상황 직면"
세계적인 반도체 생태계 측면에서도 일본이 수출 규제를 지속할 수 없을 것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강태수 KIEP 선임연구위원은 "현재 반도체 생태계의 핵심은 기술 분업"이라며 "공정이 수백개가 되는 반도체 산업 특성 상 전세계의 반도체 기업이 서로 의존하며 생태계를 이뤄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소재를 수입하지 못하게 되면 반대로 일본도 우리에게 제품을 팔 수 없게 된다"며 "또 우리가 생산하는 메모리 반도체에 공급량에 차질이 생기면 파장은 전세계적으로 확산할 수 있다. 이에 피해를 입은 국가가 연대해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원장도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에 대해 한국은 구조적인 대응이 가능하다고 본다"며 "수출 통제를 지정학적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은 결국 전세계 공급만을 망가뜨린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해 (일본의 결정이)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러시아 "한국 기업에게 에칭가스 공급할 수 있다"
러시아가 일본의 대(對)한국 수출규제 품목인 불화수소(에칭가스)를 한국 기업에 공급할 수 있다고 한국 측에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의 공급 제안이 성사될 경우 일본이 불화수소 수출을 규제하더라도 국내 기업 입장에서는 대체재가 생기는 셈이 될 수 있어 추후 논의가 주목된다.
정부 관계자는 12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러시아 측이 외교라인을 통해 불화수소 공급 가능성을 타진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러시아는 자신들의 불화수소가 경쟁력 면에서 일본산과 동등하거나 혹은 더 우위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고 부연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 역시 이날 오후 기자들을 만나 러시아 정부로부터 제안이 있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세세한 사항까지 확인해줄 수는 없다면서도 "러시아 정부가 우리 정부에 그런 내용을 전달한 바는 있다. 현재 정부가 검토 중인 부분"이라고 말했다.
지난 10일 청와대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과 30대 기업 간담회에서 독일·러시아와의 협력 필요성이 언급된 것 역시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일부에서는 공급선 변경이 생각만큼 쉽게 이뤄지지는 않으리라는 관측도 나온다.
공급선이 바뀔 경우 불화수소에 대한 시험 기간을 거쳐야 하고, 이는 생산성 저하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급작스럽게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사안이라는 이유에서다.
반도체 제조업체들이 불화수소 공급선을 한번 정할 경우 매우 장기간 그 공급선을 유지하는 것 역시 이런 점이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
업계 일각에서는 러시아가 공급한 불화수소가 일본산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느냐에 대해 의문부호를 제기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산업통상자원부도 러시아산 공급 방안에 대해 유보적 태도를 보였다.
산업부 당국자는 "현재 (러시아산 도입이 가능한지) 확인 중"이라면서 "러시아산 불화수소를 실제로 들여올 수 있는지 여부부터 따져봐야 하고, 들여온다고 해도 과연 실효성이 있는지와 함께 상업화가 가능한지 등도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美, 얼어붙은 한일관계 중재 나설까?
우리 정부가 일본의 출규제에서 시작된 한일 무역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대미 외교전에 나선 가운데, 미국 측에서 한일관계 중재를 시사하는 징후가 포착됐다.
외교부에 따르면 미국을 방문 중인 김희상 외교부 양자경제국장은 지난 11일 오전 롤랜드 드 마셀러스 국무부 국제금융·개발 담당 부차관보과 국장급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 김 국장은 최근 일본 수출규제의 문제점을 미국 측에 설명했고, 미국 측은 이를 유념하겠다는 입장을 전했다고 외교부 당국자는 설명했다.
같은 날 오후 김 국장은 마크 내퍼 미 국무부 한국·일본 담당 동아태 부차관보와도 면담을 갖고, 일본의 무역 보복조치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김 국장은 일본의 조치가 자유무역의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한다는 점과 함께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구체적으로 설명했을 것으로 전해졌다.
외교부는 일본에 수출규제 철회를 촉구하는 한편, 무역 갈등을 외교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채널을 가동했다.
차관보급인 윤강현 경제외교조정관도 11일 출국해 미국 정부 관료들을 접촉한다. 매슈 포틴저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과 앨리슨 후커 한반도 보좌관도 만날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에티오피아를 방문 중인 강경화 외교부 장관도 10일(현지시간)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과 전화 통화를 했다.
강 장관은 통화에서 이번 조치는 한일관계 및 한미일 3국 협력 측면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우려를 표명하며 외교적 해결을 위한 노력을 강조했다.
이런 가운데 미국에 급파된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이 미국 측에서 한미일 고위급 협의를 추진하고 있다고 전해 주목된다.
모건 오테이거스 미 국무부 대변인도 "한일, 한미일 간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공개적으로 또 물밑에서 해나갈 것"이라며 진전된 입장을 밝혔다.
미국 정부가 한일 통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나서겠다는 신호로 해석되며, 향후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지 관심이 쏠린다.
특히 이번 주와 다음 주 아시아를 순방하는 데이비드 스틸웰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가 내놓을 메시지가 주목된다.
우리나라가 사실상 한일갈등 해결을 위한 중재를 요청한 상황이어서 미국이 개입할 명분을 얻었다는 시각도 있다.
미국이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설지 전세계의 이목이 한반도로 집중되고 있다.
김현주 기자 hj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