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부터 끊임없이 제기된 정부·여당의 최저임금 속도조절론이 12일 새벽 ‘2.87% 인상’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최저임금위원회 공익위원들이 표결에서 사용자위원 안에 손을 들어준 것인데, 경제위기 때에 버금가는 낮은 인상률이라는 점에서 배경과 향후 파장에 관심이 쏠린다.
문재인정부가 속도조절론에 나선 것은 한국 경제상황이 안팎으로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는 안으로는 경기 불황 속에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으로 자영업자가 줄도산하고, 일자리를 찾지 못한 청년이 늘고 있다. 한국의 고도성장을 견인해온 미국과 일본이 이젠 국내 정치, 경제적 이유로 우리를 옥죄고 있다.
내우외환 속에 활력을 잃은 한국경제의 성장률이 2% 중반 이하로 떨어질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기획재정부는 최근 올해 경제성장률을 2.4∼2.5%로 낮췄고, 국제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도 2.4%에서 2.0%로 하향조정했다. 박준식 최저임금위원장은 이날 브리핑에서 “대한민국 경제 형편이 여러 가지로 어렵다고 생각한다”며 “우리가 가야 할 경제사회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다소 속도 조절과 방향 조절 같은 것들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최저임금위 임승순 상임위원은 “IMF 때는 금융파트가 어려웠는데 지금은 실물파트가 어렵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며 “최근 중국과 미국의 무역마찰이나 최근 일본 (무역제재) 부분이 경제를 어렵게 한다는 얘기가 많아 그런 부분들도 작용했다”고 덧붙였다.
정부는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이 가져올 후폭풍을 간과한 채 ‘임기 내 1만원 달성’ 공약에 맞춰 치밀한 대책 없이 가속페달을 밟았다. 2017년 16.4% 오른 7530원, 2018년 10.9% 상승한 8350원으로 결정하면서도 부담을 호소하는 경영계의 목소리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일자리 안정자금 등 자영업자 지원대책은 한 박자 늦게 나와 실효성을 떨어뜨렸다.
결국 벼랑 끝에 몰린 자영업자와 영세 소상공인들의 원성이 극에 달하고 고용지표가 부진하자, 정부는 속도조절론으로 선회한다. 당·정·청의 주요 인사들이 줄기차게 동결 또는 속도조절론을 내놨고, 급기야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5월 KBS 대담에서 “공약이 2020년까지 1만원이었다고 해서 그 공약에 얽매여 무조건 그 속도대로 인상돼야 한다,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마침표를 찍었다. 정부가 올들어 최저임금 결정체계 개편을 추진한 것도 최저임금 인상속도 조절을 위한 수순으로 해석됐다.
문재인정부 임기 내 최저임금 1만원 실현 공약은 어려워졌다. 내년과 2021년 심의에서 각각 7.9%의 인상이 이뤄져야 가능한데 현재 경제상황으로 봐서는 어렵다. 노정 간 갈등의 골만 깊어질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민노총은 “이미 국회에는 최저임금제 개악이 예정돼 있다”면서 “민노총은 최소한의 기대조차 짓밟힌 분노한 저임금 노동자와 함께 총파업을 포함한 전면적인 투쟁을 조직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노동시간 단축과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 등 앞으로 굵직한 현안 처리 과정에서 노정 간 정면충돌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또… 최저임금 ‘정치적 입김’ 논란
1988년 최저임금제도를 시행한 이래 최저임금위원회의 자율성과 독립성 훼손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최저임금 결정의 캐스팅보트를 정부가 위촉하는 공익위원이 쥐고 있어 ‘정치적 입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심의는 시작 전부터 순탄치 않았다. 고용부가 지난 2월 최저임금위를 이원화하는 최저임금 결정체계 개편 방안을 발표하자, 기존 류장수 위원장 및 공익위원 8명은 사상 첫 ‘집단 사퇴’ 카드를 꺼내 들었다. 노동계 일각에선 결정체계 개편이 국회 공전으로 지연되면서 정부가 내년도 심의의 새 판을 짜기 어려워지자 공익위원을 ‘물갈이’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심의 중에도 잡음은 끊이지 않았다. 노사 간 이견을 좁혀야 하는 공익위원들이 양측에 한 자릿수 인상률 제시안을 제출하라고 요구한 것 외에는 별다른 조율을 시도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일었다. 이 과정에서 심의·의결 마지노선(15일)을 앞두고 공익위원 측이 12일 서둘러 표결을 밀어붙여 노사 양측이 적잖이 당황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껏 33차례 최저임금 결정 중 표결 없이 노·사·공익위원이 합의로 결정한 사례는 7번에 불과하다.
내년도 최저임금 발표 후 만족한 쪽은 정부·여당뿐이었다. 노동계는 ‘대정부 총력투쟁’을 선포했고, 경영계는 “아쉬운 결정”이라고 되뇌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은 “문재인정부가 소득주도성장 폐기를 선언했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은 “임기 내 최저임금 1만원, 노동존중사회 실현이 불가능해졌다”며 총파업을 예고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와 전국경제인연합회 등은 최저임금 동결의 당위성을 주장하면서도 추후 업종·규모·지역별 차등적용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논평에서 “각계의 속도조절론을 대승적으로 수용하고 작금의 일본 경제보복에 따른 경제 위기 등의 상황에 노사가 합심해 대처하고자 하는 의지가 읽히는 결과”라고 말했다.
중소기업중앙회는 이날 긴급 입장문을 내고 “중소 영세기업과 소상공인들이 절실히 기대한 동결을 이루지 못한 것은 아쉽고, 안타까운 결과”라고 평가했다. 소상공인연합회는 “최저임금 차등화와 최저임금 고시 월환산액 삭제 등을 무산시킨 최저임금위 방침에 대한 정부의 대책이 나오지 않는다면 규탄대회를 전개하겠다”고 밝혔다.
세종=이천종 기자, 이동수 기자 skyle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