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물주 위 건물주' 꿈꿨는데… 도미노처럼 무너진 '갭투자'

박근혜정부 때 ‘빚 내서 집사라’ / 부동산 과열에 너도나도 투자 / 집주인 파산에 도미노 피해 / 보증금 떼인 세입자 앞길 깜깜

서울 영등포구의 다가구주택 ‘R하우스’에 사는 정모(28)씨. 부모님이 마련해 준 전세보증금 6200만원을 모두 잃을 위기에 놓였다. 영등포구 내 건물 3개를 담보로 대출받아 ‘갭투자’를 한 집주인이 임차인들 보증금을 갖고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은행 측은 이자가 연체되자 R하우스를 공매에 넘겼다. 공매가 이뤄지면 은행이 우선적으로 20억원 대출금을 가져간다. 은행보다 선순위 채권자인 일부 세입자는 그나마 보증금을 돌려받겠지만 순위가 밀리는 정씨는 손에 쥘 금액이 거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 몇 년 전부터 우리 사회를 휩쓴 말이다. 자기 건물을 가지고 알토란 같은 임대수익을 얻으며 노후 걱정이 없는 삶. 씀씀이는 날로 급증하는데 수입은 제자리인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이가 건물주의 꿈을 꿨다. 부동산 시장을 경제살리기에 동원한 박근혜정부는 “빚 내서 집 사라”며 투자 열풍을 부추겼다. 저금리 속에 LTV(주택담보인정비율)·DTI(총부채상환비율) 규제까지 풀었다. 남녀노소가 ‘갭투자’ 대열에 뛰어들었다. 광풍이 휩쓸고 가면서 남긴 그림자가 너무 짙다. 투자자 한 명이 쓰러지자 수십, 수백명의 꿈이 스러지고 있다.

 

14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3∼4년 전 부동산시장에서 하나의 큰 흐름이었던 갭투자의 후유증이 지난해부터 서울·수도권에서 나타나고 있다.



갭투자는 매매가격과 전세보증금의 차액을 활용한 부동산 투자를 일컫는다. 세입자들의 보증금을 낀 채 대출 등으로 매매가격과 전세금 차액만 자기 돈을 들여 투자하는 것이라서 적은 돈으로 ‘건물주’가 될 수 있다. 예컨대 집값이 1억원이고 전세보증금이 9000만원이라면 갭투자자는 집 한 채 값으로 10채를 사들일 수 있다. 오피스텔이나 아파트는 물론이고 등기는 하나이나 수십명이 거주하는 다가구건물도 대상이다.

부동산 호황기에는 별 문제가 없으나 부동산 경기가 침체되면 연쇄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 집주인이 대출금과 이자를 갚지 못하거나 집값이 떨어지면 바로 세입자가 보증금을 제대로 돌려받지 못하는 ‘깡통전세’가 넘쳐나게 된다.

2016년 2월 주택담보대출 금리는 3% 이하를 유지하다가 같은 해 7월 2.66%로 5년 새 최저점을 찍었다. 시중 유동 자금이 부동산으로 몰리면서 시장이 과열되고 대규모 갭투자 열풍이 불었다. 하지만 대출 금리는 2016년 말부터 3% 이상 오른 뒤 상승세로 돌아서 지난해 5월에는 3.49%까지 치솟았다. 반면 부동산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한 각종 규제가 이뤄지면서 얼어붙기 시작했다. 전국 부동산 매매가와 전세가 변화율은 지난해 각각 1.1%, -1.8%로 둔화한 뒤 올 상반기에는 -0.9%, -1.4%로 하락세에 접어들었다.

 

갭투자에 나섰던 건물주는 높은 이자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계약이 끝난 임차인의 전세보증금을 돌려주기가 여의치 않은 상황에 내몰렸다. 금융기관이 대출회수에 나서 부동산이 공매 등에 부쳐지면서 세입자들이 고스란히 피해를 보고 있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넓게 보면 부채비율이 80% 이상인 부동산은 모두 갭투자 부동산”이라며 “갭투자 부동산은 부동산 경기와 대출금리 등 외부요인에 취약한데 피해 대상이 대부분 사회약자 계층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하다”고 말했다.

 

◆사회 초년생의 ‘피눈물’… 절반은 “보증금 대출”

 

갭투자 부동산에 거주하다가 피해를 본 임차인들 상당수는 사회 초년생들이었다. 대다수가 전세보증금을 대출이나 부모 지원으로 마련한 사회적 약자로 드러났다.

 

14일 세계일보 취재진이 최근 서울시내에 발생한 갭투자 피해 임차인 22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피해자 중 110명(49.7%)이 만 30∼34세로 나타났다. 만 35∼39세 54명(24.5%), 만 25∼29세 32명(14.5%)이 그 뒤를 이었다. 피해자 10명 중 6명 이상이 사회 초년생인 셈이다. 직업은 사기업에 근무한다는 응답자가 126명(57%)으로 가장 많았고, 전문직이 28명(12.7%)으로 뒤를 이었다. 경찰을 포함한 공무원·공기업 직원도 10명(4.5%)이나 됐다. 피해자 상당수가 고학력자에다가 전문직까지 포함된 점은 누구라도 갭투자 임차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피해 임차인의 개별 보증금 액수는 1억5000만∼2억원이 62명(28.1%)으로 가장 많았다. 6000만원 이상∼7000만원 미만이 55명(24.9%)으로 뒤를 이었고, 2억원 이상도 53명(24%)이었다.

 

보증금을 어떻게 마련했는지를 물었더니 10명 중 9명은 대출이나 부모 지원으로 마련했다고 답했다. 대출을 받았다는 피해자가 105명(47.5%)이었고, 부모의 지원으로 마련했다고 답한 사람이 44명(19.9%)이었다. 전액을 저축으로 모았다는 응답자는 27명(12.2%)에 그쳤다. 비싼 수도권 전세보증금을 마련하기 위해 피해자 대부분이 사회적 약자라서 금융기관이나 가족한테서 돈을 빌렸음을 알 수 있다.

 

피해자들이 임대차 계약을 진행한 경로는 ‘직방’, ‘다방’ 등 부동산 애플리케이션이 143명(64.7%)으로 가장 많았다. 지역 공인중개사를 통해 계약했다고 응답한 피해자는 61명(27.6%)이었다.

 

지금 사는 부동산을 선택한 이유로는 피해자 66명(29.9%)이 편리한 교통을 꼽았다. 저렴한 보증금 44명(19.9%), 공인중개사 신뢰 42명(19%)이 뒤를 이었다.

 

김범수 기자 sway@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