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나무는 심어 놓고’에서 보는 근대와 지금의 꿈
이번 여름 흥행 중인 전시에는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의 한국근현대명화전 ‘근대의 꿈: 꽃나무는 심어 놓고’가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해 우리 근현대 시기의 주요 작품을 선보이는 자리다. 구본웅, 권영우, 권진규, 김환기, 나혜석, 남관, 박노수, 장욱진, 천경자, 한묵 등 작가 30여명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평소 미술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 들어 보았을 이름들이다.
#김환기, 남도에서 서울, 서울에서 일본, 그리고 파리로의 여정
김환기(1913~1974)는 1963년 상파울루비엔날레에 한국에서 처음 참가한 작가다. 이때 출품한 작품으로 명예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상파울루비엔날레는 1951년 브라질 문화 융성에 크게 기여한 프란치스코 마타라초 소브리뉴가 창설했다. 베니스비엔날레, 휘트니비엔날레와 함께 세계 3대 비엔날레로 꼽힌다.
김환기는 1913년 전남 신안군 기좌도(현 안좌도)에서 태어났다. 섬 소년으로 푸른 바다와 짙은 하늘 속에서 자랐다. 이 영향으로 바다와 하늘을 닮은 현색과 심청색을 작품에 자주 사용했다고 생각한다. 남도 부농의 외아들인 그는 15세에 서울로 유학을 떠나 중동학교에 입학했다. 미술에 재능을 보여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고자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쿄 일본대학 예술학원 미술부에 진학해 졸업했다. 이어서 같은 대학의 연구과 과정을 수료했다.
재학 시절 일본 개혁기에 서구 화법을 도입한 진보적 작가들을 스승으로 두었다. 기무라 쇼하치를 비롯해 나카시마 주니로 등 후기 인상주의 양식을 따른 이들이다. 또 동료 작가들과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 백만회 등의 그룹을 조직했다. 입체파, 미래파 등 서양의 새로운 미술 경향을 함께 익히며 대담한 시도를 펼쳤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리기보다는 추상적으로 해석해 내는 식이었다.
그는 귀국 이후 화가이자 교육자, 미술 행정가로 활동했다.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 추상미술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앞장선 것이다. 1950년까지는 서울대 미술대학에 재직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부산으로 피란해 홍익대 교수로도 일했다. 대표적인 제자이자 사위로 단색화 주요 작가인 윤형근이 있다.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 속에 ‘우리 것을 그려야 한다’는 자각을 거쳤다. 여러 문인과의 교류를 통해 알게 된 우리 고유의 미의식을 작업에 포함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추상화에 달, 매화, 구름, 나무, 달항아리 등 한국적 모티브를 등장시켰다. “코리아는 예술의 노다지올시다”라며 지인에게 글을 남긴 적도 있다. 작업의 원천을 한국적 미와 풍류에서 찾았음을 그대로 전한다.
1956년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나서도 이런 경향을 지속했다. 낯선 땅에서 자기 정체성을 고민하며 더 강해졌다고 볼 수도 있다. 자기 작품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정신이 나고 자란 곳에서 옴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것을 오랜 시간 작업에 담아내는 작가로 남기 위해 연구했다.
‘영원한 노래’는 이때 작업 세계를 반영한 작품이다. 실내에서 창문을 통해 보이는 풍경을 그렸다. 한국적 모티브 중에서도 십장생, 매화 등 전통적 영원 관념의 소재가 등장한다. 그것들을 자신이 창조해 낸 추상적인 분할 화면 안에 조화롭게 배열했다. 선의 교차로 인해 디자인적으로 느껴질 수 있으나 전보다 물감을 두껍게 칠해 조절했다.
#뉴욕 밤하늘에 떠올린 그리운 얼굴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앞서 언급한 1963년 상파울루비엔날레는 김환기의 작업 인생을 뒤집어 놓았다. 그는 참여 작가인 동시에 커미셔너 역할을 맡아 비엔날레를 참관했다. 그리고 세계 미술계의 활동 무대가 파리에서 미국 뉴욕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알게 됐다. 뉴욕에서 잭슨 폴록을 중심으로 생겨난 추상표현주의는 특히 인상 깊었다. 일정을 마친 직후 귀국하지 않고 그대로 뉴욕으로 향했다. 1960년대에 예정에 없던 뉴욕행은 극적이라 말할 수 있다.
처음에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록펠러재단에서 지원금을 받게 됐다. 맨해튼 73가의 아파트에 작업실도 마련했다. 그곳에서 기존에 펼치던 작업에 대해서는 잠시가 됐든 영원이 됐든 잊기로 마음먹었다. 세계 무대에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보편성과 근본성에 중점을 둬야겠다 생각했다. 그림의 기초가 되는 선과 점, 그리고 면을 연구하며 새로운 예술 항로를 개척했다. 그 끝에 다다른 것이 1970년에 등장한 전면 점화(點畵)다.
전면 점화는 글자 그대로 전면에 점이 있는 그림이다. 완성하기 위한 작업 과정은 다음과 같다. 거대한 캔버스에 점을 하나 찍는다. 점이 된 물감의 번짐이 멈출 때까지 기다린다. 번짐이 멈추면 그 옆에 또 다른 점을 찍어 화면을 메울 때까지 반복한다. 점이 가득 찬 화면을 향해 다시 붓을 든다. 점 하나를 개별 세계로 인식하고 그것의 주변을 선으로 둘러싼다. 모든 점을 선으로 둘러싸고 난 뒤에 한 번 더 그렇게 한다.
선을 그릴 때 사용하는 색은 점과 대비를 일으키거나 반대로 유사하다. 파랑과 노랑, 또는 빨강같이 서로 대비하는 경우에는 시각적 자극을 일으킨다. 비슷한 색이 어우러지는 경우에는 미묘한 진동이 생겨난다. 점은 자극과 진동을 통해 주변 세계로 확장하는 모양새를 갖게 된다. 마치 밤하늘 별이 빛을 뿜어내는 듯 보인다. 그리고 점은 무리를 이루거나 회전하면서 전체적인 질서와 조화를 이룬다. 별들이 우주에서 만들어 내는 질서, 화음과 똑 닮았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는 전면 점화의 대표 작품이다. 1971년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 출품해 대상을 받은 작품의 연작이다. 이것으로 변모한 작품 세계를 한국에 선보여 놀라움과 찬사를 받았다. 어느 비평가는 변화한 외면만을 마주한 때를 떠올리며 충격적이라고 쓰기도 했다. 물론 넓어진 내면의 세계를 깨닫고는 곧 감동했다고 한다.
작품 제목은 절친한 벗이었던 김광섭의 시 ‘저녁에’의 한 구절이다. 2015년 서울의 한 갤러리에서 작품 옆에 붙여 두었던 시가 선명하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환기는 이 시를 읽으며 고국의 친구들 생각을 하게 됐다. 뉴욕에서 한국인을 만나기란 드문 일이었다. 특히 예술을 교류할 사람은 백남준, 김창열 등 몇 되지 않았다. 하늘을 보며 그리운 대상을 떠올리는 동양적 사고가 바탕이 되어 작업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점을 하나 찍을 때마다 그리운 얼굴을 연상하고 그들과의 인연을 상징했다. 한 사람은 하나의 우주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수많은 우주가 담겨 있는 가늠할 수 없이 넓은 세계다.
#김환기를 설명하는 말은 ‘김환기’
전면 점화는 유채 물감이란 서구적 재료를 사용한다. 그런데도 한국화에서의 먹을 연상시키는 자연스러운 번짐과 스밈이 있다. 아스러지듯 사라지는 모습은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세계 어디에도 없는 독자적인 조형 양식이자 느낌이다. 이런 이유로 전면 점화는 한국 미술 경매 최고가를 네 번이나 경신했다. 김환기의 라이벌이 김환기라고 불리는 이유다. 그리고 그 전에 김환기를 설명하는 말은 김환기라고 이야기한다.
김환기는 일본에서 귀국했을 때 김향안 여사와 결혼했다. 김 여사는 시인 이상의 아내였으나 사별하고 혼자인 상태였다. 결혼 이후 둘은 사랑하며 예술적 지지자로 남은 생을 함께했다. 1974년 김환기는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에도 김향안은 예술적 지지자의 역할에 충실했다. 작고 이듬해에 환기재단을 설립했으며 1992년에는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을 세웠다. 이곳에 가면 그의 작품과 드로잉, 소품까지 만날 수 있다. 영원한 노래와 별, 그리고 꿈 그 자체가 그대로 있다.
김한들 큐레이터, 국민대 미술관·박물관학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