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안전·쾌적한 도시 추구… 소외된 자들 삶의 질 높인다 [서울의 디자인 이야기]

⑧ 모두를 위한 디자인 ‘유니버설 디자인’ / 나이·성별·신체 조건·언어 상관없이 / 융합적이고 통합적 서비스 환경 조성 / 장애인·고령자도 손쉽게 이용 가능한 / ‘배리어 프리 디자인’ 도시 곳곳 활용

◆명품 도시는 명품 거리로 기억된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암시하듯, 로마는 초기 공화국 시절부터 도로 건설에 공들였다. 아피아 가도(Via Appia)는 4차로의 너비와 1m 이상의 포장 두께를 가진 세계 최초(BC 312)의 포장도로였는데, 군사용으로 매우 견고하게 시공됐다. 그 이후 도로는 문명의 발전과 함께 확장의 길을 걷는다. 로마 멸망 뒤 중세 유럽의 도로는 상당 기간 황폐했으나, 산업혁명이 유럽을 휩쓴 18세기부터 프랑스와 영국이 새로운 도로 포장법을 개발하면서 경쟁적으로 발전한다.



서울에 포장도로가 처음 시공된 게 1926년인 점과 비교하면 2000년 이상의 시차가 있지만, 서울이 짧은 기간에 축적한 자본과 기술은 명품이라 할 만큼 훌륭한 성과와 업적을 남기고 있다. 세계의 도로는 이제 새로운 개념을 필요로 한다. 새로운 패러다임 속에서 탄생될 미래의 명품 도시가 ‘서울’로 기억되기 위해서는 이 거리를 최고의 가치와 기술과 아름다움으로 채우는 일이 더 이상 늦춰져서는 안 된다.

서울 G밸리의 버스승강장에 유니버설 디자인 적용을 연구한 시범 사업. 승강장에 디지털 기술을 접목하고, 이용 효율이 낮은 아웃렛 건물의 조경 공간을 활용해 공간의 효율을 높였다. 서울디자인재단 제공

◆디자인으로 안전하고 편해지는 도시

미국의 컨설팅업체 머서가 발표한 ‘2019 삶의 질·생활 환경 순위’는 동시대 세계인의 도시에 대한 비전이다. 오스트리아 빈이 삶의 질이 가장 높은 도시로 꼽혔다. 2위는 스위스 취리히, 3위는 독일 뮌헨·캐나다 밴쿠버·뉴질랜드 오클랜드가 차지했다. 아시아에서는 싱가포르(25위)가 제일 높았고, 서울은 77위였다.

‘삶의 질’은 도시를 소망하는 이유이자, 명품 도시의 삶이다. 산업혁명 이후에는 표준화를 통해 이를 꿈꿨고, 근대 이후엔 디자인으로 이를 창조해왔다. 인간이 도시에서 찾았던 것은 부유함만이 아니었다. 거기엔 권력과 명성, 아름다움도 꿈틀대고 있었다. 디자인 영역이 넓혀지자 세상은 장애인들을 위해서도 접근 가능성과 안전과 편리를 고도화할 수 있다고 외쳤다. ‘배리어 프리(Barrier Free·무장애) 디자인’이 그것이다. ‘평등·안전·쾌적한 도시’와 ‘모두를 위한 디자인’의 비전을 내세우자 소외된 세계인들은 디자인을 열렬히 환영하게 됐다. 요즘 디자인 현장은 인터랙션 디자인, 경험 디자인 등 비물질적 수사들이 대화를 점령하고 있고, 이미지와 각종 인공지능(AI)이 도시를 점령해 나가고 있다.

서울 G밸리의 지하철 가산디지털단지역에 유니버설 디자인 적용을 연구한 시범 사업. 그림문자(픽토그램), 안내 사인 등으로 신체 조건과 상황에 맞는 엘리베이터, 출입구 정보를 제공해 보행 약자의 정보 접근성을 높였다. 서울디자인재단 제공

◆모두를 위한 디자인의 원칙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UD)은 모두를 위한 디자인이다. 다양한 고객을 위해야 하므로 융합적이고도 통합적이다. 나이, 성별, 신체 조건, 언어 등에 상관없이 모두가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제품·서비스·환경을 디자인한다. 이와 같은 융합성과 포괄성을 위해서는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원칙이 필요했다. 1990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학의 유니버설 디자인센터장 로널드 메이스는 유니버설 디자인의 7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첫째 ‘공평한 사용’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게 해야 하고, 둘째 ‘사용의 융통성’은 사용자의 취향이나 신체적 능력을 포용해야 한다. 셋째 ‘직관성’은 경험·지식·언어 능력을 떠나 직관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하고, 넷째 ‘정보 인지성’은 사용자의 감각 능력이나 주위 조건에 상관없어야 하며, 다섯째 ‘안전성’은 실수를 해도 치명적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여섯째 ‘적은 신체적 노력’이란 신체 크기나 자세, 이동 능력에 상관없이 무리 없게 조작하도록 하는 것이다. 일곱째 ‘접근 용이성’은 적절한 크기와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서울 G밸리의 주차장 차량 진출입로에 유니버설 디자인 적용을 연구한 시범 사업. 고원식 횡단로와 점자블록, 다양한 출차 경고 사인 등으로 보행로의 연속성과 안전성을 확립했다. 서울디자인재단 제공

◆체계적 사업 추진을 위한 UD 기본조례 제정

서울시가 안전과 편리성의 관점에서 도시와 디자인을 보기 시작한 건 2000년대부터다. 2016년 5월19일 ‘유니버설디자인 도시조성 기본 조례’를 제정하며, 건축기본법에서 다루던 공공 공간과 건축기본조례 중 공적 공간을 적용 범위로 포함했다. 도시디자인 조례에 따른 심의 대상과 건축 조례에 따른 심의 대상, 경관 조례가 규정하는 공공기관 건축물, 경관 조례 별표에 따른 심의 대상은 물론, 그 밖에 시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사항 등을 포함하도록 규정했다. UD 관점에서 봐야 할 것이 대폭 늘어난 것이다.

고령자와 장애인의 가파른 증가에 따라 디자인의 관심 영역도 확장됐는데, 그 시작은 장애인들의 접근 가능성(accessibility)을 확장하기 위한 배리어 프리 디자인 사업이었다. 장애인용 보행자 도로가 늘어났고, 건물의 문턱이 낮춰졌으며, 둘레길에 개설된 휠체어용 전용 도로는 장애인이나 고령자의 등산도 가능하게 했다. 이런 과정에서 시행착오도 없지 않았다. 접근 가능성을 확대한다고 장애인용 승강기를 설치했으나 기뻐해야 할 장애인들이 오히려 외면했다. 장애인들은 비장애인과 함께 타는 보통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애의 의미도 문제였다. 장애가 기존에는 ‘전문적인 의료적 치료’의 의미가 내포돼 있었다면, 점차 개별적·신체적 문제라기보다는 ‘사회 속의 물리적·조직적·태도적 장벽들에 의해 존재’(유엔장애인권리협약 제4조)하는 접근성의 문제로 새롭게 정의돼야 했다.

서울 G밸리의 큰 건물마다 있는 공개공지에 유니버설 디자인 적용을 연구한 시범 사업. 휠체어나 유모차를 위한 충분한 이동공간, 흡연구역 분리 등으로 시민들이 휴게공간을 쾌적하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게 했다. 서울디자인재단 제공

◆탁상행정을 거부하는 UD 시범 사업

UD 사업의 성패는 관계 집단 간의 소통과 협력이 좌우한다. 다양한 집단 간 조화는 명확한 디자인 의사 결정과 정보 전파 능력을 결정한다. 서울 G밸리 시범 사업은 바로 이 문제를 실질적으로 파악하고 대안을 수립하려는 의도로 서울시와 서울디자인재단이 진행했다. 지난해 6월부터 6개월간 서울과학기술대 고영준 교수팀이 금천구 가산디지털단지역 일대 G밸리에서 공공가로, 사인보드, 공개공지(공원), 전철 역사 등 4가지 시설물을 대상으로 UD의 적용을 연구한 시범 사업이다.

연구는 현장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청취하고 의사소통을 강조하기 위해 지역 주민 등과 수차례 인터뷰를 했다. 연구 과정은 5단계로 구성됐다. 1단계에서는 대상지의 현황 조사를 실시했는데, 주민의 협력과 연구원의 참여가 중요했다. 2단계에서는 G밸리 UD 테스트 베드 종합계획을 수립했다. 이를 바탕으로 3단계에서는 유형별로 UD을 개발했고, 4단계에서는 현장에 나가 UD 컨설팅을 실시하고, 마지막 5단계에선 결과 보고서를 만들었다.

결과는 큰 만족이었다. 개념적인 연구 사업과는 달리, 모두가 ‘모두를 위한 디자인’(UD)에 더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다. 석·박사 과정의 연구원들은 직접 휠체어를 시승하기도 했고, 시각장애인처럼 안대를 착용하고 거리를 걸어봄으로써 말로만 듣던 장애인의 고통을 체험하려 했다. 가장 큰 깨달음은 장애인만을 위한 디자인을 시행할 경우, 장애인은 물론 비장애인으로부터도 공감을 얻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함께 타는 공공디자인 정책만이 모두를 위한 디자인의 꽃을 피울 수 있다는 신념을 얻게 된 것이다.

동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명품 도시와 거리를 디자인하기 위해서는 정보 네트워크의 확장과 고도화 또한 매우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시와 서울디자인재단이 시민들의 UD 라이프 스타일 체험을 위해 추진하고 있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의 UD 혁신 플랫폼은 향후 UD 사업 전담부처 또는 추진기관으로의 성장이 기대된다. ‘서울’을 미래의 명품 UD 도시로 탄생시키는 데 요구되는 인식 개선과 정보 확산, 고도화를 위한 기폭제가 될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박인석 한국예술종합학교 디자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