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어느 인간에게 두렵지 않을까. 평범한 촌로에서부터 막강한 절대권력 소유자까지, 이 세상 이후의 삶에 대한 고민은 인류 문명 역사와 함께 해왔다. 수많은 사람들의 생사여탈권을 쥔 절대 권력은 현세뿐 아니라 내세 권위까지 확보될 때 유지될 수 있었다. 절대자 무덤에는 당대 최고 기술이 집약되었고 수많은 부장품이 함께 묻혔다. 그래서 많은 문명에서 절대자 무덤은 후세로 이어지는 타임캡슐 역할을 해 왔다.
다신교를 숭배한 고대 이집트의 복잡한 사후세계를 모두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이집트는 다른 문명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사후세계와 관련한 유물을 남겼다. 사후세계에 대한 관심이 컸던 탓도 있겠지만 현실세계와 관련한 유물과 유적들은 얼마 되지 않은 비옥한 지역에 몰려 있어 다음 세대를 거치면서 변용되고 훼손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죽음 이후를 위한 시설들은 대부분 현세에 이용하기 어려운 사막에 주로 지어졌다. 많은 도굴에도 이집트인들이 건설한 사후세계와 관련된 유적들은 건조한 사막 기후와 일반인들의 외면 덕에 아직까지 우리 곁에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그중 상당수가 왕가의 계곡에 자리하고 있으며 오늘은 죽은 자들의 땅으로 발걸음을 내딛기로 했다.
아직 산 자들이 활동하기 이른 새벽, 나일강은 평화롭다. 조금은 쌀쌀한 바람이 사막을 넘고 강바람에 실려 크루즈 갑판 위로 불어온다. 커피 한 잔에 삶의 향기를 맡으며, 태양이 한낮의 위용을 떨치기 전에 서둘러 채비를 마치고 죽은 자들의 땅을 향해 나선다.
왕가의 계곡을 둘러보기 전 멤논 거상으로 향한다. 오전 6시부터 관람이 가능하다고 하여 이른 시간부터 서둘렀는데 벌써 관광객들이 모여 있다. 기원전 1351년에 완공된 2개의 거대한 조각상은 경작지에서 사막으로 이르는 경계에 위치해 있었다. 무려 720t에 이르는 석영암 덩어리로 만들어진 조각상이 서 있는 곳은 아메노피스 3세의 장례신전 입구였다고 한다. 이후 등극한 파라오들이 자신들 신전 건축을 위해 조금씩 훼손하고 기원전 27년 일어난 지진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한다. 2개의 거대한 상은 모두 파라오 두건을 착용한 아메노피스 3세다. 조각상 앙 옆에는 어머니와 부인의 여인상이 하나씩 서 있다.
‘멤논’이라는 이름은 전혀 엉뚱하게 붙여졌다. 이 지역을 여행하던 그리스인들이 석상이 새벽의 여신, 에오스(Eos)의 아들 멤논과 닮았다고 여겨 이런 이름을 붙인 것이다. 새벽에 석상에서 종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고도 한다. ‘멤논’은 ‘새벽의 통치자’라는 의미로 트로이전쟁에서 아킬레스에게 살해되는 에티오피아왕의 이름이란다.
왕들의 무덤이 이집트 남부에 위치한 이유는 도굴 방지를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도굴을 막기 위해 피라미드를 짓지 않고 골짜기에 공동묘역을 만들었으며 수직 갱도를 이용하여 관을 숨기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도굴꾼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왕가의 계곡에서 도굴당하지 않은 묘는 투탕카멘 묘밖에 없을 정도라고 한다. 하지만 벽화, 미라 등 유물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어 무덤만으로도 충분히 역사적 가치를 지니는 곳이다. 적지 않은 입장권 가격이지만 투탕카멘 무덤을 볼 수 있는 별도 입장권까지 추가로 구입하고 현장으로 들어섰다.
2005년 새로운 방이 발견되고 2008년 무덤 입구가 두 개 더 발견됨에 따라 이 계곡에는 63개의 무덤과 방이 있다. 무덤은 KV54라 명명된 단순한 구덩이부터 120개 이상의 방이 있는 KV5까지 다양한 형태이다. 이집트 신왕국 주요 왕실 인사들과 다수 특권층 귀족들의 주요 매장지 벽화는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장면들로 장식되어 있으며 그 시대의 믿음과 장례 의식을 엿볼 수 있다. 당시 진귀했을 부장품들은 대부분 도굴되었지만 당시에 막강한 힘을 누렸을 파라오 권위만은 화려한 벽화와 웅장한 무덤으로 남아 있었다.
왕들의 계곡 근처 위치한 ‘왕비의 계곡’은 왕자와 공주, 그리고 귀족들의 다양한 구성원들뿐 아니라 파라오 아내들이 묻혔던 곳이다. 이곳이 매장지가 된 이유는 디르 엘 메디나의 노동자 마을과 왕들의 계곡에 가깝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지만, 계곡 입구에 있는 하토르에게 바쳐진 신성한 동굴의 존재가 죽은 사람들 원기를 회복시킨다는 설명이 납득하기 더 쉬웠다. 왕비의 계곡은 고대에 ‘아름다운 곳’을 뜻하는 ‘타셋네페루’로 알려져 있었다. 그 가운데 네페르타리의 무덤이 가장 유명하다. 이 무덤은 이집트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 중 하나라고 한다. 눈앞에 펼쳐진 황량한 사막만으로는 상상이 어렵지만, 베를린 미술관에서 본 그녀의 두상을 떠올리니 짐작이 가능하다. 네페르타리가 신들에 의해 인도되는 장면을 상상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이 지역은 18세기 말부터 전 세계 고고학의 초점이 되어 왔으며, 아직까지도 발굴이 계속되고 있다. 1979년에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으며 투탕카멘을 포함해 대부분의 부장품들은 카이로에 있는 이집트 박물관에 옮겨져 있다고 한다. 여행 막바지에 이집트 박물관을 가 보기로 하고 뜨거운 태양 아래 지하 무덤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벽화들을 따라 그 시대를 상상하며 하루를 보낸다.
여행가·민트투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