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중국과 러시아의 폭격기 4대의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 진입과 러시아 조기경보통제기 1대의 독도 영공 침범은 일촉즉발의 분위기가 우려될 만큼 긴박하게 이뤄졌다. 중국과 러시아 군용기는 동해 상공을 자신들의 작전구역으로 생각하듯 거리낌 없이 비행했으며, 우리 공군은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 경고사격을 가하는 아슬아슬한 상황이 벌어졌다.이날 합참의 설명에 따르면 중국의 H-6 폭격기 2대는 오전 6시44분 이어도 북서쪽 방면에서 KADIZ에 진입했다. H-6 폭격기는 오전 7시14분 이어도 동쪽으로 KADIZ를 벗어난 뒤 동해 방향으로 북상하기 시작했다. 오전 7시49분 KADIZ에 다시 진입한 H-6 폭격기는 울릉도와 독도 사이를 지나 북상했고, 8시20분 이탈했다. H-6 폭격기는 이후 오전 8시33분 러시아 TU-95 폭격기 2대와 합류, 남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중국과 러시아 폭격기 4대는 오전 8시40분 울릉도 북방 KADIZ에 재진입한 뒤 울릉도와 독도 사이를 통과해 9시4분 KADIZ를 벗어났다.
중·러 군용기의 도발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러시아 A-50 조기경보통제기 1대가 오전 9시9분 KADIZ와 독도 영공을 침범했다. 우리 공군은 즉각 KF-16 전투기 2대를 출동시켜 차단기동과 경고통신을 보냈으나 A-50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KF-16 1대에서 플레어(적 미사일을 피하기 위해 발사하는 유도장치) 10여발과 함께 경고사격으로 기총 80여발을 쐈다. A-50은 오전 9시12분 영공을 벗어났으나 9시33분 독도 영공을 또다시 침범했다. 우리 공군 KA-16 전투기 1대가 플레어 10여발과 경고사격 280여발을 가하자 A-50은 9시37분 영공을 이탈했다. 군 관계자는 “격추사격을 감행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러시아 A-50은 고도와 속도가 일정했고 무장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해 실시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남쪽으로 이동했던 중국·러시아 폭격기 4대 중 러시아 폭격기 2대는 재차 북상해 오후 1시11분부터 1시38분까지 KADIZ를 통과했다. 중국과 러시아 폭격기의 동해 비행 과정에서 우리 공군은 F-15K와 KF-16 전투기 18대를 출격시켜 중·러 폭격기의 움직임을 감시하며 경고통신을 했다. 공군 전투기는 중국 폭격기에 대해 20여회, 러시아 폭격기와 조기경보통제기에 대해 10여회에 걸쳐 무선 경고통신을 했으나 응답을 받지 못했다.
한편 일본 정부는 독도에 대한 영유권 도발을 다시 했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정례 브리핑에서 “한국 군용기가 (러시아 군용기에) 경고사격을 한 것에 대해 ‘다케시마(독도의 일본 표현)의 영유권에 관한 우리나라(일본)의 입장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으며 극히 유감이다’고 한국에 강하게 항의하고 재발 방지를 요구했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는 러시아 군용기가 독도 인근 접근 때 항공자위대기를 긴급 발진시켰으며 러시아 정부에도 항의했다.
◆中·러, 사전준비한 ‘무력 도발’
중국·러시아 군용기가 23일 오전 동해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과 독도 영공을 침범하면서 한반도 일대가 강대국들의 무력시위 무대로 바뀔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중국 군용기가 우리 측의 반발을 무시한 채 KADIZ를 드나드는 상황에서 러시아 군용기가 처음으로 대한민국 영공을 침범하면서 향후 한반도 일대에서 중국·러시아의 영공 침범행위가 재발할 우려도 제기된다.
◆한·미·일 안보협력 헐거워지자 중·러 ‘틈새 파고들기’
중국·러시아의 이번 KADIZ와 영공 침범은 한·미·일 안보협력에 맞선 중국과 러시아의 무력시위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한·미·일 3국은 오랜 기간 북한 핵·탄도미사일 위협에 맞서 긴밀한 안보협력 체제를 구축해 왔다. 특히 미 핵추진항공모함을 비롯한 전략자산이 참가한 가운데 동해상에서 실시됐던 한·미 연합훈련은 동해에서 중국과 러시아의 움직임을 견제하는 효과도 적지 않았다는 게 군 안팎의 분석이다. 하지만 남북 화해 분위기와 북한 비핵화 협상을 지원하기 위해 미군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가 중단되고, 대규모 연합훈련도 이뤄지지 않으면서 한·미동맹의 효용성이 낮아지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됐다.
여기에 일본의 대(對)한국 수출 규제로 한·일관계가 악화되면서 국내에서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재검토 가능성이 거론되는 등 한·미·일 안보협력 체제가 이완되는 기미가 뚜렷해졌다. 군 소식통은 “중국과 러시아가 군사행동을 통해 한·미·일 3국의 안보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동해에서 주도권 장악을 노리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사전에 준비한 도발
중국과 러시아가 동해 KADIZ 진입을 사전에 준비한 정황도 포착됐다. 군 관계자는 “중국과 러시아 군용기가 KADIZ에 함께 들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장거리를 비행하는 전략폭격기의 경우 비행경로 설정과 해상 불시착 등에 대비할 해군 함정 사전배치 등의 조치가 취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와 관련해 군 관계자는 “경북 포항 동쪽 해상과 이어도 남쪽 해상에 중국 호위함들이 활동 중인 것으로 안다”고 말해 중국과 러시아가 사전 협의와 준비를 거쳐 동해에서 군용기를 동원한 군사훈련을 실시했다는 관측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이와 관련해 러시아 국방부는 이날 언론보도문을 통해 “러시아와 중국 공군이 장거리 군용기를 동원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처음으로 연합 공중 초계비행을 수행했다”며 “훈련은 제3국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며, 양국 군의 협력수준 향상 등을 목적으로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러시아가 우리 군의 군사대비태세를 떠보기 위해 의도적으로 도발을 했다는 관측도 나온다. 냉전시절 러시아 군용기들은 서방 측 영공을 넘나들면서 영공방위태세가 어떻게 구축되어 있는지를 살폈다. 독도 영공을 침범한 비행기가 정보수집을 담당하는 A-50 조기경보통제기라는 것도 이 같은 관측을 뒷받침한다는 평가다.
◆“정부 대응 약했다” VS “긴장 고조”
정부는 지난해부터 중국 군용기의 KADIZ 침범이 지속되자 주한 중국대사관 국방무관 등을 불러 항의해 왔다. 하지만 중국 군용기가 이어도를 지나 울릉도와 독도 사이를 비행하는 등 수위를 높이는 상황에서 정부 대응수준이 약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반면 영공 침범에 대응하는 과정이었으나 경고사격을 했다는 점에서 러시아가 도발 수위를 높일 경우 한·러 간 마찰이 불가피하다는 우려도 나온다. 신종우 한국국방안보포럼 사무국장은 “우리 군이 중국이나 러시아의 KADIZ 진입에 소극적으로 대응했던 결과”라면서도 “러시아가 앞으로 군용기를 동해로 보낼 때 정찰기뿐만 아니라 전투기를 같이 보내 긴장 상황을 높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여, 영공 침범 공식입장 자제… 야 “안보 벼랑 끝에”
여야는 23일 중국과 러시아 군용기가 동해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 등에 무단 진입한 사건에 대해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중국과 러시아의 행위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집권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공식 입장을 최대한 자제한 반면 야당은 “대한민국 안보가 벼랑 끝에 섰다”며 정부의 외교·안보전략의 재정비를 촉구했다.민주당 이재정 대변인은 이날 오후 서면브리핑을 통해 “러시아와 중국 군용기는 우리 군의 대응 이후 대마도와 나가사키 일대의 일본 영공을 비행해 빠져나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며 “일본은 쓸데없는 억지를 부릴 것이 아니라, 자국 영공 방어에 집중하기 바란다”고 지적했다. 한 민주당 관계자는 “국가 대 국가의 외교·안보 사안인 만큼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자유한국당은 문재인 정권의 안보 공백이 부른 사태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인 자유한국당 윤상현 의원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동북아에서 벌어지는 중·러 대 미·일 각축전에 한국이 링으로 이용되고 있는 형국”이라며 “정부 외교 안보력에 대한 전면 재정비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같은 당 민경욱 대변인도 “‘이제 적은 없다’는 장밋빛 환상에 취한 문 정권의 막장 안보관이 대한민국을 무장해제시켰다”고 목청을 높였다.바른미래당 이종철 대변인은 논평을 내고 “중국과 러시아가 한국방공식별구역과 우리 영공을 침범한 행위에 대해 강력히 규탄한다”며 “우리 정부는 중·러의 도발 행위를 결코 묵과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중국과 러시아가 우리를 얕보고 무도하게 행동하는데 한·미 동맹은 불안하고 일본 관계도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고 정부의 대책마련을 촉구했다.
박수찬 기자, 도쿄=김청중 특파원, 이정우·안병수·곽은산 기자 psc@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