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처럼 가늘고 긴 빌딩… 자본·건축법·기술 ‘합작품’ [박상현의 일상 속 미술사]

⑧ 21세기 맨해튼 스카이라인 왜 바뀌고 있나 / ‘시카고 스쿨’ 건축가 마천루 첫 주도 / 초기 설계 건물들은 직육면체 형태 / 뉴욕, 일조권 고려 ‘용도구획법’ 제정

최근 뉴욕시 맨해튼에 있는 센트럴파크 남쪽에는 흥미로운 빌딩들이 들어서고 있다. 멀리서 보면 마치 연필처럼 가늘고 긴 빌딩들이다. 너무 높아서 하늘을 긁는다는 뜻의 마천루(skyscraper)로 유명한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이지만, 요즘 들어서는 빌딩들처럼 좁고 높은 빌딩들은 과거에는 본 적이 없다. 어느 건축 평론가는 이 현상을 두고 로마제국이 시멘트를 사용해 돔을 만든 것이나, 19세기 말 미국에서 처음 등장한 마천루처럼 한 시대의 건축을 상징할 만한 사건이라고까지 말했을 정도다.

왜 뉴욕에서는 21세기에 이런 새로운 형태의 건물을 짓고 있을까? 이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대 건축사의 흥미로운 한 부분을 들여다봐야 한다. 바로 근현대 미국을 대표하는 두 도시, 뉴욕과 시카고의 마천루 건축사 이야기다.

뉴욕 맨해튼 센트럴파크 남쪽에는 연필처럼 길고 가는 빌딩들이 들어서고 있다.

◆두 도시의 경쟁



디자인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말을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말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미국에서 이름을 날린 유명한 건축가 루이스 설리번이 한 것으로, 건물의 형태는 그 건물이 사용되는 용도에 따라서 결정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고 상식적인 말처럼 들리지만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표현이었다. 왜냐하면 당시까지만 해도 건물을 지을 때는 과거의 유명한 양식들 중 하나를 차용해서 짓는 것이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식, 고딕식, 르네상스식 등 과거 유럽의 찬란했던 건축사에서 잘 알려진 양식 중 하나를 골라서 건물을 지었기 때문에 서구에서는 100년 이전에 지어진 건물들은 하나의 스타일이 설명서처럼 따라다닌다.

하지만 설리번이 활동하던 19세기 말은 대도시에 인구가 집중되면서 공간이 부족해졌고, 높은 빌딩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마침 강철을 만드는 기술도 탄생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좁은 도시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빌딩을 지으려고 했다. 그런데 과거 건축사의 전통적인 양식으로는 공간의 낭비가 너무 심했다. 고딕식 첨탑이나 로마식 돔은 보기는 아름다울 수 있어도 사무공간으로 사용할 수 없는 죽은 공간이었고, 르네상스식 건물 역시 지나친 장식으로 건축비 낭비가 심했다.

설리번은 건물을 지을 수 있는 공간을 직육면체로 가득 채운 새로운 형태의 건축물을 원했다. 장식이 많은 전통적인 건축만 보아왔던 사람들에게 평범한 직육면체에 가까운 괴상한 건축물을 지어야 하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설리번은 건물은 장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수행하는 기능이 중요한 것이고, 거기에 충실해야 함을 설득하면서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말을 한 것이다.

미국에 마천루를 처음 소개한 사람들은 소위 ‘시카고 스쿨’에 속한 건축가들이었다. 여기에는 설리번과 그의 제자이자 미국 건축의 상징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도 포함된다. 흔히 20세기의 뉴욕이 마천루 건축을 주도했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시카고가 초기의 주도권을 잡았다. 특히 19세기에 발명된 내연 강철을 이용한 최초의 현대적인 고층빌딩도 뉴욕이 아닌 시카고에 먼저 등장했다. 빠르게 성장하던 미국 경제와 도시 부동산의 수요, 그리고 건축기술이 만난 것이다.

비록 설리번은 장식보다 기능을 강조했지만, 그가 활동하던 시절만 해도 건물 외벽에는 아름다운 무늬가 남아 있었고 균형미를 잃지 않았다. 하지만 뉴욕이 경쟁에 뛰어들면서 건물이 변하기 시작했다. 높은 건물이 많아지면서 도시가 보기 흉해졌다는 비판 때문에 시카고가 빌딩의 높이를 46미터로 제한한 사이, 높이 제한을 두지 않은 뉴욕에 지금 우리도 유명한 플랫아이언 빌딩(86.9m), 울워스 빌딩(241m) 등이 마구 들어서면서 시카고의 스카이라인을 비웃기 시작했다.

1932년 뉴욕 맨해튼의 스카이라인. 셋백(setback) 룰이 적용되어 고층으로 올라갈수록 계단모양으로 좁아지는 모습을 한 빌딩들이 생겨났다.

◆어둡고 숨막히는 도시

그런데 두 도시가 마천루 경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도시에 사는 주민들이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좁은 도시에 하늘을 찌를 듯한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서면서 대낮에도 길거리는 어둡고 숨이 막혀서 살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런 불만은 당연히 마천루가 더 높고 많은 뉴욕시에서 심했고, 그 결과 1916년 뉴욕에서는 빌딩이 들어서는 대지를 가득 채우는 직육면체 형태의 마천루 건축을 금지하는 법이 생겨났다.

‘1916년 용도구획법’이라고 불리는 이 조치는 뉴욕의 스카이라인을 크게 바꿨다. 건물을 높게 짓고 싶다면 소위 셋백(setback)이라는 방법을 사용해야 했다. 건물이 위로 올라가면서 계단 형태로 점점 좁아지도록 한 것으로, 이 법의 핵심은 도시 거주민들이 하늘을 볼 수 있고, 햇볕을 쬘 수 있게 하는 데 있었다.

1932년의 맨해튼 사진을 보면 1916년에 제정된 법이 스카이라인을 어떻게 바꿨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반면 같은 시기에 시카고는 그런 법을 제정하지 않았고 높이만을 제한했기 때문에 지금 기준으로는 다소 작고 뚱뚱해 보이는 빌딩들로 스카이라인이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21세기에 들어서서 갑자기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을 바꾸고 있는 연필 모양의 마천루들은 왜 등장한 걸까? 이 역시 뉴욕의 건축법과 무관하지 않다. 뉴욕시는 1961년, 수십년 된 용도구획법을 개정하면서 FAR(floor-area-ratio), 우리식으로 말하면 ‘용적률’에 해당하는 룰을 만들었다. 대지 면적을 기준으로 건축물의 부피에 제한을 둔 것이다. 즉, 건물을 가늘고 높게 짓든, 낮고 넓게 짓든 총 부피만 맞추면 되었다.

루이스 설리번이 설계한 시카고 증권거래소 빌딩. 시카고의 초기 빌딩들은 대지를 가득 채운 직육면체를 하고 있었다.

◆뉴욕식 자본주의 정신

그런데 여기에서 뉴욕식 자본주의 정신이 발휘된다. 용적률에 제한을 받아서 일정 높이 이상을 지을 수 없게 된 건축주라도 주변에 건물을 더 높게 지을 수 있음에도 용적률을 모두 사용하지 않아서 공중권(air rights)이 남아도는 건물이 있다면 그 건물주에게서 공중권을 사들일 수 있게 한 것이다.

원래는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낮은 건물을 부수고 더 높은 빌딩을 지으려는 건물주를 만류하는 대신 재산권을 보전해 주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였지만, 일단 통과된 후에는 돈을 가진 사람들이 맨해튼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건물의 주인들을 찾아다니며 공중권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런 대표적인 건물이 유명한 맨해튼의 트럼프 타워로, 원래는 용적률 때문에 20층 이상 올릴 수 없던 것을 인근에 있는 오래된 티파니 빌딩의 공중권을 사들여서 58층의 타워가 된 것이다.

그러다가 21세기에 들어오면서 전 세계적으로 빈부격차가 극심해지면서 갑부들이 안전한 투자처를 찾아 부동산 가격을 높이기 시작했다. 특히 뉴욕을 비롯한 미국의 대도시는 러시아와 중국의 자본이 들어왔지만 투자할 빌딩이 부족했다. 그런 잉여자본이 찾은 것이 센트럴파크 남쪽에 남은 작은 땅들이었고, 지난 수십년 동안 발전한 건축기술과 뉴욕 건축법의 도움으로 그렇게 작은 땅에도 초고층 빌딩을 지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국 오늘날 바뀌고 있는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은 자본과 건축법, 그리고 건축기술이 만들어낸 합작품이라는 점에서 19세기와 달라진 건 없다. 그저 모양만 달라졌을 뿐이다.

 

박상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