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칼럼에서는 2015년 7월 영화 ‘암살’(감독 최동훈)이 개봉됐을 때 즈음 ‘친일영화’, ‘친일영화인’을 다루며, 친일 청산 과정에서 명확한 잘못 인정, 사과, 참회, 처벌, 용서, 화해 등의 과정이 진행되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한 바 있다.
그런데 2년이 지난 현재에도 ‘친일’ 논의는 뜨겁다. 많은 이들이 좀 더 기억하고 행동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와중에, 또다시 ‘친일영화’와 ‘친일영화인’들에 대해 몇 자 더 적어볼까 한다. 변화는 기억 없이는 불가능하고, 기억하기 위해서는 반복 학습이 중요하다.
올해 ‘한국영화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며 한 쪽에서는 ‘친일영화’에 대한 논의도 존재한다. 이는 새로운 논의는 아니다. 첫 한국영화가 제작된 1919년은 일제강점기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관련 논의는 진행되어 올 수 밖에 없었다.
초기 한국영화는 모두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영화들이었다. 영화 제작 인력들 중 상당수는 일본인이었고, 제작 자본의 대부분도 일본 자본이었다. 또한 당시 조선총독부는 검열 등을 통해 영화를 통제했다. 여러모로 당시 한국영화는 ‘친일’ 논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친일’의 정의는 매우 가변적인데, 기준에 따라서는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모든 초기 한국영화들은 친일영화로 명명될 수 도 있다. 어디까지 용인할 것인가의 문제는 영화계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대략적으로 1930년대 후반 이후 조선총독부가 강력하게 개입해 제작된 영화들을 ‘친일영화’로 명명하고 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돌입한 일본은 식민지 조선에서 더욱 강력한 민족말살정책을 펼쳤고, 영화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1942년 이후, 조선총독부는 국내 영화사들을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로 통폐합 시켰다. 이후 국내 영화들은 이 회사에서만 제작이 가능했는데, ‘천황폐하의 신하국민으로서 충성을 다하자’는 주제의 영화들로만 제작되었다. 영화 속 인물들은 기꺼이 전쟁에 참전했고, 참전하는 남편과 아들을 자랑스러워했다.
1942년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 해산된 영화 단체가 하나 있었는데, 1939년 설립된 ‘조선영화인협회’였다. 언뜻 보면 영화인들이 자발적으로 설립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상 관제 성격의 단체였다.
이 단체에 가입하지 않은 영화인들은 사실상 영화 일을 할 수 없었는데, 심사를 통해서만 가입이 가능했다. 그리고 그 심사위원회의 위원장은 당시 영화 검열을 담당하던 조선총독부 과장이었다.
말하자면 1930년대 후반부터는 더더욱 강력한 조선총독부의 통제 속에서 사상이 검증된 영화인들만이 영화 일을 할 수 있었고, 1942년부터는 국내 유일의 영화사에서 대놓고 친일적인 주제를 담아내는 영화만이 제작되었다. 그것도 일본어 대사로만 제작됐다. 이 시기 영화들이 주로 ‘친일영화’로 명명되고 있다.(물론 관련 기준에 대한 논의는 지속되어야 한다.)
또한 이 시기 영화에 참여한 영화인들이 주로 ‘친일영화인’으로 평가된다. 심사 과정을 통해 관련 단체에 가입하고, 명확한 친일 주제의 영화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는 이 시기 영화계에서 활동했던 감독, 스태프, 배우 등의 이름이 올라가 있기도 하다.
해방 후 사회 전반적으로 친일 청산이 이뤄지지 못했듯이 영화계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 최인규 감독은 해방 직전 ‘태양의 아이들(원제:太陽の子供達)’(1944), ‘사랑과 맹서(원제:愛と誓ひ, 사진)’ (1945), ‘신풍의 아이들(원제:神風の子供達)’(1945) 등의 친일영화를 연출했다가, 해방 후 ‘자유만세’(1946)과 같은 항일영화를 연출했다. 당시에도 스스로 면죄부를 주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이었다고 한다.
이후 주한미군 공보원의 이후 최인규 주한미군 공보원의 의뢰를 받아 정부 홍보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는데, 남한 단독 정부 수립 선거에 대한 교육영화인 ‘인민투표’(1948) 등도 제작했다.
일제강점기 시기였으니 당시 모든 영화가 ‘친일영화’이고, 모든 영화인들이 ‘친일영화인’이라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다만 그 시기에 어떤 일들이 있었고, 어떤 참여나 강요가 있었는지, 그 결과 어떤 영화들이 제작되었는지 상황은 이해할 필요가 있겠다. 발굴되어 현재 온라인에서도 감상이 가능한 이 시기 영화들을 감상해볼 수도 있다.
또한 쉽진 않겠지만, 해당 영화인들의 이후 행보도 찾아보고,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혹시 자신의 과거를 인정하고, 사과하고, 변화한 삶을 살았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해방될 줄 몰랐다.” “현실에 적응해야했다.” “다들 그랬다.” 식의 행보를 보였다면 이 역시 기억하고 평가할 필요가 있겠다. 이는 다른 분야 인사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과거에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는 없다. 또한 대를 이어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다만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파악하고, 기억하고, 책임은 지었는지, 이후 변화는 없었는지 등 정보를 업데이트 하는 일들은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그에 따른 추가적인 고민과 행동도 뒤따라야 할 것이다.
새삼 영화 ‘암살’의 마지막에서 해방될 줄 몰랐다며 자신의 친일 행각을 정당화하던 친일 인사의 뻔뻔한 대사가 새삼 떠오른다. ‘들킬 줄 몰랐다.’ ‘문제될 줄 몰랐다.’ ‘상처가 될지 몰랐다.’ 등의 변명은 지금도 여러 분야에서 여전히 들려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일대학교 연극영화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