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총성 없는 경제전쟁의 한복판에 섰다. 한·일 경제전쟁은 일본 아베 신조 정부가 먼저 방아쇠를 당겼다. 지난 2일 한국을 전략물자 수출우대국인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한 일본의 조치는 반시장적이고 비상식적이다. 무역 제재는 통상 무역적자국이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 최소한으로 활용하는 마지막 수단인데 일본은 한국을 상대로 연간 200억달러 안팎의 흑자를 기록하는 나라다. 그동안 한국은 일본의 소재·부품을 수입해 조립·가공한 뒤 미국, 중국 등에 수출하는 국제분업의 틀 속에서 성장해 왔다. 아베 정부의 이번 조치는 한국의 주요 완성품 생산에 필수적인 소재·부품 공급을 막겠다는 것이어서 국제분업에 바탕한 자유무역 정신에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비판이 거세다. 한국 경제에는 자유무역체제가 정상적으로 가동됐던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보다 더 심각한 위기라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처럼 엄혹한 상황 속에서도 외교적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정부는 일본의 회군을 설득하고, 미국 등 국제사회의 도움을 이끌어내야 한다. 외교 전문가들은 자유무역 원칙을 훼손한 일본의 ‘잘못된 결정’을 각국에 치열하게 설명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러면서도 일본이 협상의 길로 복귀하도록 설득전과 압박도 지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경제는 선진국 도약을 앞둔 갈림길에 서 있다. 지난해 국내총생산(GDP) 12위에 랭크된 한국 경제는 2단계 성장로켓을 점화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삼성전자의 2030년 시스템 반도체 글로벌 1위 비전, SK하이닉스의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현대자동차의 수소전기차 프로젝트 등은 혁신성장을 위한 대표 프로젝트들이다.
아베 정부의 포괄적 수출규제 조치는 이런 프로젝트를 지연시키거나 무산시킬 파괴력을 지녔다. 우리 정부와 산업계는 대일 응전을 위한 총력전 태세에 들어섰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부문은 반도체다. 반도체는 한국 경제성장을 이끌어온 중추산업이자 ‘산업의 쌀’이라고 불린다. 수출 1위 품목으로 전체의 20%를 차지하고 있어 한국 수출의 전체 흐름을 주도할 뿐 아니라 경제성장률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일본이 한·일 경제전쟁의 포문을 열면서 반도체를 첫 번째 타깃으로 삼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메모리 반도체를 넘어 비메모리(시스템) 반도체 경쟁력까지 키워 2030년까지 명실상부한 종합반도체 강국으로 도약하겠다는 정부와 우리 기업의 비전에 태클을 걸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삼성전자는 지난 4월 시스템반도체에 133조원을 투자하고 1만5000명의 전문인력을 직접 고용해 세계 1위로 도약하겠다는 내용의 ‘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했다. 세계 메모리시장 1등에 안주하지 않고 더 많은 기회와 성장 가능성이 있는 시스템 반도체 분야를 집중 육성하겠다는 전략이다.
이를 위한 5대 중점 과제는 팹리스(반도체 설계)·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생태계·인력·기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산업연구원 김양팽 전문연구위원은 “삼성전자가 인텔을 꺾을 수 있었던 것은 지난 2년간 D램 가격이 급상승한 덕분이고, 지금은 D램 가격이 다시 반값 이하로 떨어져 영업이익이 악화된 것”이라며 “호황이었던 지난 2년간 반도체업체들이 설비투자를 많이 한 결과 공급 과잉으로 반도체 가격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와 기업이 메모리 반도체 육성 때처럼 시스템 반도체에 역량을 결집하는 모습이 메모리를 포기하고 시스템 반도체에 매달려온 일본에게 큰 위협이 됐을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그래서 일본의 1차 수출규제 대상에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소재가 포함됐다는 것이다.
반도체 업계에선 메모리와 비메모리 전반에 걸쳐 사용되는 실리콘 웨이퍼, 블랭크 마스크 등이 추가 규제 품목으로 지정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블랭크마스크(석영유리기판)는 유리기판 위에 반도체의 미세회로를 형상화하는 포토마스크 원재료로 일본산 비중이 65.5%에 달한다. 특히 초미세공정에 쓰이는 극자외선(EUV)용은 일본 호야가 전량 생산하고 있다. 파운드리 시장 1위를 목표로 하는 삼성전자는 올해 하반기부터 EUV 양산을 시작할 예정인데, 호야의 블랭크 마스크가 필수적이다. 둥근 원판 모양의 웨이퍼는 불필요한 부분을 깎아내면 반도체 칩이 되는 기본 소재로, 일본 섬코와 신에쓰화학이 전 세계 시장 점유율의 53%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SK실트론(9%)과 독일 실트로닉스(13%) 등이 웨이퍼를 생산하고 있어 일본산 대체가 불가능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재고를 최대한 확보하고 국산화와 수입선 다변화 등 생산에 차질이 없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며 “협력사에 재고 확보를 요청하는 한편 글로벌 거래처도 안심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일본이 자국 기업과 글로벌 IT업계에 미칠 파장을 고려해 반도체 소재와 부품의 대한국 수출을 완전히 차단하지는 못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언제든 중간재 공급을 차단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긴 만큼 이번 조치를 반도체 공정 국산화의 촉매제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반도체 주요 공정의 국산화율은 평균 15% 안팎이다. 노광, 이온 주입 등 일부 장비와 소재는 국산화율이 0%에 가깝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이주완 연구위원은 “반도체 공정의 국산화율이 장비 20%, 소재 50%라고 하지만 이는 평균일 뿐”이라며 “반도체 공정에 필요한 20개 장비 중 진입장벽이 낮은 화학증착, 식각, 세정 등 3분의 1 공정에 업체들이 몰려 있어 아예 국산화가 안 된 장비도 많다”고 지적했다. 중장기적으로 특정 국가 의존율을 낮추고 협력업체들의 경쟁력을 키워 국산화율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수요 대기업과 중소 소재·부품·장비 업체가 개발단계부터 공동 참여해 동반 발전하는 반도체 생태계의 선순환고리 구축이 필수적이다.
시스템 반도체시장 육성을 위해 관련 규제 완화와 인재 육성 등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도 수반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 연구위원은 “메모리 분야에 몰두한 나머지 팹리스나 패키지 모두 중국기업에 뒤처지고 삼성전자가 파운드리에서 중국을 앞선 것도 얼마 안 됐다”며 “4차 산업혁명과 함께 수요가 폭발하는 팹리스와 파운드리 분야를 전폭적으로 육성해 비메모리 분야 포트폴리오를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수미 기자 leolo@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