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부가 민족문화 말살을 위해 전통한지 제조공정을 왜곡한 지 100여년이 흘렀습니다. 이제 진짜배기 전통한지는 찾아보기도 힘들어졌어요.”
얼마 전 대통령이 수여하는 각종 훈·포장 증서, 공무원 임명장, 대통령 기록물 등의 상당 부분이 전통한지로 둔갑한 ‘일본식 한지’로 만들어진다는 이야기를 전통문화관계자로부터 접했다. 일제강점기 문서 대량생산이 다급해진 조선총독부가 높은 기술력, 오랜 시간과 복잡한 공정을 요하는 ‘전통한지’ 공정을 편의대로 왜곡했다는 게 학계의 중론이다. 몇 백년간 보존유지가 가능한 전통한지 제조기술을 완전히 사장시키고, 우수한 조선 문화를 말살시키자는 취지에서 추진됐다는 설명이다.
전통한지 관련 전문가와 장인들에 따르면 조선총독부가 도입한 한지제조 공정에 따라 생산된 ‘일본식 한지’에는 도침(搗砧·한지 표면에 광택을 내고, 보풀을 없애 먹을 잘 먹게 하고 보존성을 높이는 기술) 등 고급 후처리 기술 등이 생략돼 있다. 또 전통한지는 원재료를 천연나무로 두드리는 고해(叩解) 과정을 정성스레 거쳐 입자파괴를 최소화하지만 일본지는 비터기(믹서기)를 이용한다. 이 같은 이유 등으로 일본식 한지는 몇 백년간 원형이 유지되는 전통한지의 보존기능을 따라가지 못하고 수 십년이면 부식이 시작된다.
진짜 문제는 한지 수요가 줄어들면서 제대로 된 전통한지 공정을 정확히 알고 구현할 장인들이 하나둘씩 업계를 떠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명실공히 전통한지 장인으로 일컬을 수 있는 장인들이 15명가량 남아 있긴 하지만 다들 나이가 팔순에 근접했다. 설상가상으로 공식 기술승계자는 2∼3명에 불과하다. 이대로 방치하다가는 조만간 정확한 전통한지 제조 기술을 가지고 있는 장인을 찾기 어려워지는 날이 올 수도 있다.
한 한지장인은 “정부마저 전통한지를 외면하는 상황이다. 수요가 없는데 어떻게 전통한지 만드는 것을 지속할 수 있겠느냐”고 토로했다. 제 값을 쳐주지 않는 정부와 공무원들 분위기 탓에 주요 공정을 생략하다 보니 애써 확보한 기술력마저 잃어가고 있다는 한탄이었다.
우리 고유의 정신문화가 깃들어 있는 전통기술을 유지하고 한지장인들을 배출하기 위한 정부의 의지가 너무나 절실한 시점이다. 최소한 외교문서나 대통령기록물만큼은 전통한지를 사용해야 국가의 품격을 높일 수 있지 않을까.
김라윤 사회2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