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엘패소 총격범, 보수언론 反이민 언어 그대로 받아썼다”

NYT, 인과관계 분석 보도 / 폭스뉴스·CNN·MSNBC 원고 분석 / 이민자 대해 ‘침략’ ‘대체’로 표현 / 총격범 선언문 내용과 상당수 비슷 / “자극적인 개념, 트럼프 반복 사용 / 정당화 이후 공격적 재생산 구조” / 美전역서 일주일새 8건 위협 비상
4일(현지시간)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한 미국 오하이오주 데이턴의 오리건 지구에 피해자들의 신발이 한 곳에 모여져 있다. 뉴욕=AP연합뉴스

“미국을 침범하려는 ‘국경 점퍼’(border jumper·난민을 지칭)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줄 지도자가 있을까요?” (폭스뉴스 앵커 터커 칼슨)

 

“침입자들은 쏴버려도 됩니다.” (폭스뉴스쇼 출연자 앤 코울터)

 

“이민자들의 목적은 미국 고유의 색을 희석시키는 것이며, 고로 이것은 ‘침략’(invasion)입니다.” (라디오 진행자 러시 림보)

 

미국의 우익 언론들이 이민자와 관련해 쏟아낸 이런 자극적인 언어가 최근 미국 사회를 경악시킨 총격범들에게 상당 부분 영향을 줬다는 분석이 나왔다. 수백만명에게 도달하는 영향력을 지닌 언론 플랫폼이 이민자를 ‘침략 프레임’으로 다뤘고, 그 핵심 단어들은 총격범의 선언문 등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5일(현지시간) 워싱턴 백악관에서 지난 주말 텍사스주와 오하이오주에서 발생한 총기난사 관련 대국민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워싱턴=AP연합뉴스

뉴욕타임스(NYT)는 11일(현지시간) 보수 성향의 미디어에서 다뤄진 단어와 개념 등이 이번 엘패소 총격범의 언어와 얼마나 일치하는지 분석한 결과를 보도했다. 지난 3일 텍사스 엘패소의 월마트에서 벌어진 총기 난사는 22명의 희생자를 냈다.

 

총격범 패트릭 크루시어스(21)가 온라인 커뮤니티 에잇챈(8chan)에 올린 2300자 분량의 선언문에는 보수 언론의 언어와 유사한 부분이 상당수 발견됐다. 둘의 공통점은 유색인종을 향한 두려움을 조장하는 비관용의 언어를 썼다는 것이다. NYT에 따르면 크루시어스의 게시물에는 ‘침략’과 문화적 ‘대체’ 등 민족주의 진영의 개념이 자주 등장했다.

사격 연습하듯… 3일(현지시간) 미국 텍사스주 국경도시 엘패소의 총기난사 사건 용의자 패트릭 크루시어스가 귀마개를 착용하고 소총을 든 채 월마트에 들어서고 있는 모습이 찍힌 CCTV 화면. 엘패소=AFP·AP연합뉴스
3일(현지시간) 미국 텍사스주 엘패소의 한 쇼핑몰 내 월마트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벌어진 뒤 월마트 직원들이 충격에 빠진 채 망연자실해하고 있다. 엘패소=AP연합

지난 5년간 폭스뉴스, CNN, MSNBC 원고에 등장한 ‘침략’과 ‘대체’ 등의 단어 사용 빈도를 분석한 결과 “꽤 공격적인 재생산 구조가 있다”고 미국 네오콘(신보수주의자) 지식인 윌리엄 크리스톨은 밝혔다. 그는 NYT에 “폭스뉴스에 어떤 개념이 등장하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반복해 말해 정당화된다. 이후에 또 다른 이가 더 심하게 말하는 식”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최근 총기 난사 등 혐오범죄가 빈발한 것과 관련해 미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이유를 비판했다. 이날 NYT는 버락 오바마 전 행정부가 정치적 이유로 국내 테러 가능성이 높아졌음을 인정하지 못한 탓에 대비가 부족해졌다고 지적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한 2009년 이후 미 국토안보부는 극심한 경제난, 소셜미디어 사용 확산, 첫번째 흑인 대통령 탄생 등의 요소가 결합해 인종 극단주의 부상으로 이어진다고 예상했다. 하지만 이를 공표하는 것이 더 큰 정치적 혼란을 가져온다고 오바마 행정부는 판단했다. 그렇게 증오범죄의 싹이 방치된 채 커져 왔다는 것이다.

 

한편 CNN은 미 전역에서 여전히 계속되는 총기 난사 위협을 보도했다. CNN에 따르면 엘패소 사건 이후 일주일 동안에만 최소 8건의 위협이 이어지면서 곳곳에서 용의자들이 체포됐다.

 

정지혜 기자 wisdom@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