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정부는 22일 '한일군사정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을 연장하지 않기로 했다. 한국을 안보상 신뢰할 수 없다며 수출규제 조치를 취한 나라와 안보 분야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느냐는 문제의식에 따른 협정 종료 결정이다.
지소미아가 한미일 안보협력 체제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에 비춰 '조건부 연장' 예상도 있었지만 일본의 거듭된 대화 거절로 인해 단호한 의지를 내보인 것으로 풀이된다. 신뢰 문제를 들어 먼저 경제보복을 가한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 정부로서는 이제 반박이 어려운 처지에 내몰리게 됐다.
지소미아가 파기될 경우 이같은 한일 협력은 물론 한미일 안보협력 체제에 만만치 않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미국도 협정 유지 필요성을 강조해 왔다. 우리 정부가 지소미아를 두고 고심을 거듭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럼에도 청와대의 단호한 결정이 나온 것은 결국 먼저 불신을 드러낸 아베 총리 정부가 초래한 것이라는 지적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대화 의지를 강조하고 일본에서 일부 온건 기류가 생기긴 했지만 여전히 간극은 크다.
일본 외교당국은 한국이 국제법 위반 상황을 해소해야 한다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렇다보니 단시일 내에 접점을 찾는 건 쉽지 않다. 그럼에도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둘러싼 이견을 좁히는 외교 당국 간 대화 유지는 물론, 수출 규제 당국 간 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은 상황이다.
정부가 22일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을 연장하지 않기로 결정한 가운데, 일본의 수출규제로부터 촉발된 한일 경제전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벌써부터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다.
현재로서는 안보분야 협정 종료인 만큼 당장은 직접적인 영향을 가늠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미중 무역전쟁이 하반기 경제에 걸림돌이 되는 상황에서 우리 경제에 불확실성을 키우는 요인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이번 사안이 한국을 겨냥한 일본의 수출 규제로 시작됐다는 점에서, 일본의 향후 대응에 따라 한일 경제전쟁이 확전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정부는 이날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가 취해진 가운데 안보상 민감한 군사정보교류를 목적으로 체결한 협정을 지속하는 것이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면서 지소미아를 연장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일본이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한일 간 신뢰 훼손으로 안보상 문제가 발생했다는 이유로 우리나라를 '백색국가'(화이트 리스트)에서 제외, 양국 안보협력 환경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했다는 게 정부가 제시한 이유다.
일본은 지난달 4일부터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3개 품목에 대해 수출규제 조치를 개시한 데 이어 지난 2일 아베 신조 총리 주재로 각의(국무회의)를 열어 한국을 수출 절차 간소화 혜택을 인정하는 백색국가 명단에서 제외하는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을 의결, 한일 경제전쟁을 촉발한 바 있다.
정부는 이후 지난 12일 일본이 자국의 백색국가에서 한국을 배제한 것처럼 한국의 백색국가에서 일본을 제외하는 등 대일 수출규정을 대폭 강화하는 방식으로 맞대응을 했다.
일본은 이후 일본의 수출규제 대상 3개 품목 중 하나인 일본산 포토레지스트에 한정해 수출을 2차례 허용했다. 이를 통해 삼성전자가 화성반도체 공장의 극자외선(EUV) 생산라인을 가동을 위한 최대 9개월치 물량을 확보한 것으로 전해지면서 한일 경제전쟁은 소강상태에 접어드는 듯했다.
이런 와중에 정부가 지소미아 종료를 결정하면서 우리 경제의 불확실성은 커지는 게 불가피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전망했다.
◆정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연장 안하기로…소강상태의 한일경제전쟁 다시 확전할 듯
한국 정부가 지소미아를 연장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일본이 이에 대한 보복 조치로 추가 경제 보복을 펼칠 가능성이 커졌다.
일본 정부는 그동안 발표한 수출 규제 보복 조치를 더 빡빡하게 운용하면서 한국을 압박하는 동시에 관세나 비자 발급 기준 강화 등 추가적인 보복 카드를 만지작거릴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 정부는 일단은 기존 1~2차 조치와 관련해 규제 대상을 늘리며 한국의 산업계에 실질적인 피해를 주면서 숨통을 조이는 전략을 사용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일본 정부는 이밖에도 해운이나 식품 등 한일 간 무역 분야에서 유무형의 추가적인 조치를 만지작거리면서 한국 경제에 추가적인 타격을 줄 방안을 검토할 것으로 예상된다.
관세 인상, 송금 규제, 한국인에 대한 비자 발급 기준 강화 등을 추가적인 조치로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파급 효과가 이전보다 더 클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즉각 이런 조처를 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일본 정부가 그동안 두차례 단행한 경제 보복 조치를 놓고는 일본 정부 내에서도 반도체와 전자제품의 공급망을 훼손해 일본 기업이 역풍을 맞을 것이라는 지적이 거세게 제기됐었다.
또 한국에서 일본 제품과 여행 불매 운동이 거세게 확산하고 있다는 것 역시 추가적인 보복 조치를 망설이게 할 가능성도 있다.
특히 일본 여행 자제 운동의 영향이 규슈나 오사카, 돗토리, 홋카이도 등으로 확산하고 있어 자칫하면 지역 경제의 침체로 인한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질 여지도 있는 만큼 일본 정부 입장에서는 한국과 한국인들의 반발을 무시하기 힘든 상황이다.
한국과 일본이 상대방을 향해 보복 조치를 번갈아 단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일 관계의 다음 분수령은 오는 28일 2차 경제 보복 조치의 시행일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까닭에 일본 정부가 일단은 숨 고르기를 한 뒤 28일 백색국가에서 한국을 배제하는 조치를 시행한 후 한국의 반응을 지켜보고 추가적인 보복 카드를 선택할 가능성도 있다.
◆日 즉각 맞보복 가능성 높지 않아…자국 반발, 한국인 정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은 22일 오후 9시30분쯤 남관표 주일한국대사를 일본 외무성으로 불러 지소미아를 종료하기로 한 우리 정부 방침에 항의했다.
고노 외무상은 지소미아를 종료하기로 한 결정이 안보 환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정이라며 매우 유감이라고 말했으며, 이에 대해 남 대사는 일본 정부의 입장을 잘 전달하겠다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노 대사가 밤 늦은 시간에 남 대사를 초치(招致, 불러서 안으로 들임)한 것은 이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외교 소식통은 오후에 발생한 상황이더라도 다음날 대사를 초치하는 게 보통이라며 밤 늦은 시간에 급히 초치를 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한국 정부 방침에 대한 불만을 강하게 표명하기 위한 계산된 행동으로 풀이된다.
남 대사는 이날 통상 대사가 초치될 때 이용하는 본관 정문이 아닌 다른 문을 통해 외무성 건물에 들어갔고, 밤 늦은 정문 인근에 모인 취재진은 대사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이에 대해 주일 한국대사관 관계자는 "일본 정부와 협의를 통해 정한 경로로 들어간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노 외무상은 남 대사가 돌아간 뒤 기자들을 만나 "협정(GSOMIA) 종료 결정과 일본의 수출관리 운용 수정(무역 규제 강화)은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라고 한국 정부에 단호히 항의했다"고 말했다.
고노 외무상이 남 대사를 초치한 것은 한 달여만이다.
고노 외무상은 지난달 한국 대법원이 내린 징용 피해자에 대한 배상 판결을 논의할 중재위원회 구성에 한국 정부가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참의원 선거 직전인 지난달 19일 남 대사를 외무성으로 불러 항의했으며 한국 정부의 태도가 "극히 무례"하다고 하는 등 격한 반응을 보였다.
◆美 지소미아 종료 소식 듣고 한국정부에 '강한 우려' 표명
미국 국방부가 한국 정부의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와 관련해 몇 시간 만에 입장을 바꿔 '강한 우려'를 표명했다.
애초 낸 '한일의 신속한 이견 해소 촉구' 수준의 입장에서 수위를 끌어올린 것으로, 몇 시간 만에 입장 변화가 생긴 배경을 놓고 관측이 분분하다.
미 국방부는 22일(현지시간) 오후 1시쯤 데이브 이스트번 대변인 명의의 논평을 통해 한국 정부의 지소미아 종료 결정에 대해 "강한 우려와 실망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논평은 "한일과 가능한 분야에서 양자·3자의 국방·안보협력 추구를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내용은 국방부가 몇 시간 전 낸 논평과 톤이 상당히 다른 것이다.
국방부는 이날 오전 역시 이스트번 대변인 명의의 논평으로 "한일 양국이 이견 해소를 위해 협력하길 권장한다. 양국이 이를 신속하게 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밝힌 바 있다.
국방부가 같은 사안에 대해 두 차례 입장을 내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그것도 몇 시간 만에 수위를 꽤 높인 논평을 내놓으면서 미국 당국의 입장 변화 배경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미 입장을 냈는데도 구태여 입장을 다시 내놓은 것으로 볼 때 최고위층의 생각을 반영해야 하는 상황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미 국방부는 두 번째 논평을 발표하면서 '업데이트'라고만 제목에 명시했을 뿐 이유는 따로 설명하지 않았다.
애초 내놓은 입장 역시 국방부 내부의 논의를 거쳐 발표된 입장이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입장 배포 이후 이 정도로는 미국 정부의 입장을 충분히 표현할 수 없다는 식의 의견 제시가 고위급에서 있었을 개연성이 있는 것이다.
특히 미국이 그간 한일 갈등 속에도 한미일 안보협력의 상징인 지소미아는 유지돼야 한다는 입장을 한국 정부에 거듭 당부해온 점으로 볼 때 한국 정부의 지소미아 중단과 관련해 좀 더 강력한 입장 표명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있었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 과정에서 일본 측의 물밑 요청이 있었을지도 관심을 끄는 대목이다.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을 먼저 시작하고도 지소미아 종료에 반대해온 일본은 외교 경로 등을 통해 일본의 정당성 확보를 위한 설득작업을 꾸준히 벌여온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이 '강한 우려와 실망감'을 골자로 입장을 다시 내는 상황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미국과 사전 논의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외교 부담 커진 韓…한미관계 악영향 미칠 수도
정부가 지소미아를 연장하지 않기로 한 것은 일본의 대(對)한국 수출규제 등에 따른 대응조치지만 한국 외교의 부담은 훨씬 커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한일관계의 갈등 분야가 과거사와 경제를 거쳐 안보로까지 확대된 것은 물론이고 미국이 지소미아의 연장을 강하게 원했다는 점에서 한미관계까지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까지 제기된다.
미국은 지난달 초 한국에서 지소미아 종결 가능성이 흘러나오자 직간접적으로 이를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우리 측에 전달해 온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달 초 일본이 한국을 수출 절차 간소화 혜택 대상인 '백색국가' 명단에서 제외하려 하자 한국이 이에 대한 대응조치로 지소미아 종료 가능성을 언급한 것을 두고도 미국에 대한 '압박 카드'라는 분석이 많았다.
한일갈등 해소를 위해 미국이 역할을 하도록 만들기 위해 지소미아를 건드린 것 아니냐는 해석이었다.
그만큼 민감한 사안이다 보니 정부도 지소미아 연장 여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미국과 긴밀히 협의하는 한편 종결 시 한미동맹에 미칠 영향을 다각도로 분석해 온 것으로 전해졌다.
설령 미국이 겉으로는 한국의 결정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내심 자신들이 추구하는 한미일 안보 협력을 저해하는 결정을 내린 데 대해 불만을 가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남북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이 일본과 등지고 미국과의 관계도 예전과 같지 않게 되면 자칫 외교적으로 고립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특히 이 과정에서 미국이 다른 방식으로 한국을 압박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한국 또한 한미동맹 관리를 위해 더 많이 기여하려 할 가능성도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미국이 한국 정부의 지소미아 종결 결정으로 강제징용 배상판결과 수출규제를 둘러싼 한일 갈등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면서 갈등 해소를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자극제가 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野 "'조국 정국' 물타기 위한 극약처방" 강력 비판
자유한국당은 청와대가 지소미아 종료를 결정한 데 대해 "문재인 대통령이 조국(曺國)을 지키기 위해 조국(祖國)을 버렸다"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특히 청와대가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비판 여론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이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은 '조국 정국 물타기를 위한 극약처방'이라고 비난했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이날 오후 강기정 청와대 정무수석으로부터 지소미아 종료 결정 배경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기자들과 만나 "전통적인 한미동맹과 한미일 공조보다는 북중러 체제에 편입되겠다는 속내를 보여준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고 설명했다.
나 원내대표는 또한 페이스북을 통해 "문 대통령은 본인만의 조국(曺國)을 지키기 위해 온 국민의 조국(祖國)을 버렸다"며 "정권의 오기에 우리 안보가 희생당했다"고 말했다.
나 원내대표는 이어 "지난 광복절 경축사 당시에만 해도 지소미아 파기까지는 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며 "왜냐하면 지소미아 파기는 그 자체로 매우 위험한 결정이라는 사실을 이 정권도 알았을 터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결국 국익, 국민의 안전, 대한민국 안보보다도 문재인 정권의 이익과 안위가 더 우선이었다"며 "개탄스럽고 또 개탄스럽다. 분노하고 또 분노한다"고 비판했다.
한국당에서는 이번 결정의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는 시각이 적지 않았다. 조국 후보자에 대한 청문 정국으로 코너에 몰린 여권이 지소미아 종료로 시선을 분산하고 국면을 전환하려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한국당이 지소미아 종료를 강력하게 비판했다가는 또다시 '친일 프레임'에 갇히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조 후보자 청문 정국으로 모처럼 호재를 만난 한국당이 역공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현주 기자 hj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