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톡으로 사랑을 고백하고 이별을 선언하는 시대다. 연서(戀書)를 보내려 매일 사선(死線)을 넘나든 사나이 이야기는 바보 같다. 하물며 외모 콤플렉스 때문에 자신의 진심을 숨긴 채, 마음을 전달할 말과 글이 없는 꽃미남 부하를 위해 대신 고백한 짝사랑이다.
죽기 직전에야 떳떳이 사랑을 고백할 수 있었던 ‘시라노’, 자신이 받은 사랑이 자신의 것인지 고민하며 죽은 ‘크리스티앙’, 진정한 사랑을 너무 늦게야 알게 된 ‘록산’. 뮤지컬 ‘시라노’의 세 주인공은 묻고 또 묻는다. 사랑이 무엇인지.
여러 뮤지컬 중에서도 시라노는 “모든 스코어가 빼어나다”는 평을 듣는다. 그중 시라노 몫으로는 ‘거인을 데려와’와 ‘나 홀로’가 대표곡인데 코믹 풍의 ‘달에서 떨어진 나’도 빼놓을 수 없다. 짝사랑하는 록산과 크리스티앙의 결혼식을 지켜주기 위해 시라노는 가면을 쓰고 ‘달에서 온 외계인’이라고 노래하며 록산과 정략결혼하려는 드기슈를 가로막는다. 사랑하는 여인의 결혼을 지키기 위해 가면을 쓰고 광인(狂人) 행세를 해야 하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시라노의 절망을 류정한은 마치 만화 주제가 같은 이 노래로 잘 표현했다.
연출을 맡은 김동연은 여주인공 록산이 자칫 두 남자 사이 갈팡질팡하는 ‘민폐 캐릭터’가 되지 않도록 공들였다. 이날 공연에선 레미제라블에서 에포닌 역 등을 맡은 실력파 박지연이 류정한에게 밀리지 않는 가창력과 연기를 선보였다. 실력차 나는 남녀 듀엣은 화음이 어그러지는 ‘재앙’이다. 류정한과 박지연이 부른 ‘벨쥐락의 여름’은 선명한 이미지를 만들며 깊은 여운을 남겼다.
허망한 비련(悲戀)으로만 채워질 위기에서 뮤지컬 시라노를 구한 건 세 번째 주인공으로 꼽을 만한 ‘가스콘 용병대’다. 옛 프랑스 남서부 가스코뉴 출신으로 구성된 가스콘 용병대(가스콘)는 왕정 프랑스 실존 무력집단. 제작사는 용병대로 적었지만 실상 프랑스 국왕 근위대(총사대) 주축을 이룬 일종의 기사단이다. 물려받을 게 없는 둘째 아들로만 구성돼 용맹을 자랑했다. 뮤지컬에서도 실제 펜싱칼을 휘두르며 시라노의 분신(分身)으로서 박진감 있는 무대를 보여줬다.
무모할 정도로 자유분방한 삶에, 사랑은 쟁취하지 못한 시라노 역시 가스콘 지휘관으로선 완성된 자아를 보여준다. 스페인군에 포위된 진중에서 같이 싸우다 죽기를 각오한 드기슈와 악수를 하고, 전쟁 후에는 자신의 사랑 대신 전사한 부하의 사랑을 끝까지 지켜준다. 보는 이로선 답답한 선택이나 시라노는 헌신과 희생이 사랑의 본질이자 낭만이라고 강조하다.
순애보로 포장됐지만 결국 뮤지컬 시라노는 ‘전쟁터인 삶’의 쉽지 않은 선택에 대한 질문이다. 시라노는 “눈치 보며 시를 끄적이며 구걸하듯 살게 두지 않아, 거짓으로 위선으로 무뎌진 심장을 깨워 비겁한 족쇄를 벗고 거인과 맞서리라”고 노래한다.
서서 죽음을 마주하는 순간에는 “거인들이 오는구나. 나의 오래된 적들! 감히 내 코를 노려봐? 그래 상대해주마! 자 덤벼라, 오만! 편견! 비열함! 모든 거짓과 위선들! 내 삶으로, 전쟁터로 들어오너라, 싸워 내고 또 싸워 내줄 테니! 그래, 빛나는 월계관도, 장미도, 화려한 축포도 내겐 필요 없다! 오늘 밤, 내가 달나라로 돌아갈 때 그때 가져가야 할 단 한 가지는… 한 점 없는, 얼룩 한 점 없는… 나의 영혼.”
결말은 슬프지만 뮤지컬로서 시라노는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우리가 비극을 봐야 하는 이유로 꼽혀온 ‘카타르시스’를 통한 감정의 순화를 선물해준다. 서울 광림아트센터에서 10월 13일까지.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