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이 올 하반기 첫 작품으로 택한 건 ‘스카팽(9월4∼29일)’이다. 셰익스피어와 나란히 거론되는 위대한 극작가 몰리에르 작품. 근세 이탈리아 희극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DNA를 지닌 프랑스 희극이다. '스카팽'이 더욱 기대되는 건 몸짓을 활용한 연출에선 독보적인 임도완 극단 사다리움직임연구소장이 연출을 맡아서다. 프랑스 자크 르콕 국제연극마임학교를 졸업한 임도완은 특히 ‘보이첵’으로 공연 예술계에선 세계적 권위를 지닌 에든버러 페스티벌에서 수상한 연출가다.
임 연출이 국립극단 작품을 맡은 건 처음인데 왜 ‘스카팽’을 택했는지 묻자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몰리에르 작품이 우리나라에서 그리 많이 올라가지는 않습니다. 근래는 거의 없었던 듯해요. 몰리에르가 세계적 극작가인데 국립극단에서 그의 작품을 알리는 것도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배역 안배 등 여러가지를 생각했어요. 연극에 여자 배역이 적습니다. 그래서 여자 배역이 많은 작품이 뭐가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그래도 (여자 배역이) 많은 작품이 스카팽이었습니다.” 서울예술대학교 공연창작학부 교수인 임 연출은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보니 여학생이 손해를 많이 본다. 남학생 배역이 많아서. 요즘 올라오는 뮤지컬을 봐도 남자들이 주인공을 꿰어차고 여자는 한두 배역 밖에 없지 않나”라고 덧붙였다.
스카팽에 대해선 “그동안 제가 연출한 것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작품이 될 것”이라며 ‘재미’를 장담했다. 이 작품은 정략결혼을 약속한 두 재벌가의 아들, 딸이 각자 신분도 모르는 사람과 사랑에 빠지자 이를 하인 스카팽이 해결사로서 풀어나가는 줄거리다. 임 연출은 “모든 몰리에르 희극의 주제는 결국 ‘함정’이다. 이 작품에선 결혼하기 위해 사기를 친다. 몰리에르는 여기에 높은 분, 부자들에 대한 풍자를 더했다. 그래서 당대에도 지위 높은 이들이 몰리에르 작품을 좋아하진 않았다”고 설명했다.
원작 '스카팽의 간계(Les Fourberies de Scapin)'는 1600년대 작품인 만큼 당연히 요즘 세태에 대한 임 연출의 풍자가 더해질 수밖에 없다. 그에게 어떤 대목에 가장 비판적인지 묻자 금전만능 풍조의 확산과 교육문제를 꼽았다. “부자들이 좀 가진걸 나눠줬으면 좋겠습니다. 땅속으로 가져갈 것도 아닌데. 아이들 교육문제 등에서 물질만능주의가 지닌 폐해가 더 확산한다고 생각해요. 초등학교만 해도 돈 없으면 못 보냅니다. 오래전에는 학교에서 구구단을 배웠는데 요즘은 학원에서 배워오지 않으면 학교에서 선생이 짜증을 내요. 늦둥이가 초등학교 2학년이라 더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임 연출은 배우들에게 작품과 배역을 어떻게 해석하고 연기해야 할 지 등 숙제를 많이 내주는 거로 유명하다. 첫 만남인 국립극단 배우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임 연출은 “그동안 스카팽이라는 인물이 너무 전형적으로 무대에서 구현됐다. 그런 것에서 벗어나자고 제안했다. 현시대에 그가 과연 어떤 인물인지 찾아와보라고 했다. 굉장히 어려워했는데 새 모습을 많이 찾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연기자 스스로 뭔가를 찾아서 자기 것이 되어야 무대 위에서 에너지가 나온다. 연출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걸 잡기 시작하면 배우는 무대 위에 선 꼭두각시가 된다. 연기자가 작품을 통해 발전할 수가 없다”고 설명했다.
‘크리스토퍼 논란클럽’, ‘굴레방다리의 소극’ 등 최근에도 화제작을 계속 무대에 올리고 있는 임 연출이지만 그가 오랫동안 추구해온 몸짓연극의 걸작은 독일 극작가 게오르크 뷔히너가 쓴 미완성 희곡을 남다르게 해석한 ‘보이첵’이다. ‘다시 볼 기회가 없겠는가’라는 물음에 임 연출은 고개를 저었다. 배우가 비교적 많이 필요한 작품인데 요즘 연극계에선 외부에서 활동하거나 심지어 아르바이트 등 생업에 바쁜 배우를 여럿 모아 큰 작품을 연습시키는 게 힘들다고 한다. “지금 연극을 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극단) 월세내는게 어려워요. 내년부터는 연구소도 아카데미 체제로 바꾸려고 합니다. 배우 교육에 더 신경을 많이 쓰고 공연은 인원이 적게 나오는 작품들로 가려고 합니다.”
연극인생 30여 년째인 임 연출은 뮤지컬이나 영화 등과 달리 연극계는 경영 상황이 더 나빠졌다고 단언했다. 어쩔 수 없이 연극계가 정부 문예 지원에 많이 도움받았는데 최근 정부 문예 정책이 창작자에 대한 직접 지원은 줄이고, 대신 지자체 예술 인프라 등에 대한 투자를 늘리는 추세라고 한다. 클래식·뮤지컬 등에는 대규모 지원을 아끼지 않는 기업도 연극에는 좀처럼 후원하지 않는다. 임 연출은 “고대부터 연극은 귀족이 지원 안 하면 연명하지 못하는 구조였다”며 “어려운 상황에서 20년, 30년 넘게 운영된 극단이라면 그 노력을 봐서 정부가 지원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임 연출은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연극계 상황을 설명하다가도 연극의 미래에 대해선 확고하게 낙관했다. “연극무대라는 것은 생생하잖아요. 아무리 ‘5G’로 실시간 중계를 하네 어쩌네 해도 무대에서 배우가 관객과 직접 소통하는 장르는 연극입니다. 유튜브 등이 인기여도 사람들이 그런 매체에 질리고 직접 소통하고 싶어할 때가 있습니다. 직접 살아있는 사람이 무대위에서 움직이고 말하고 노래하고 웃고 그런 것을 따뜻하게 지켜보는 공간이 극장밖에 남지 않을 겁니다. 앞으로 아무리 컴퓨터, 인공지능이 발달해도 극장이라는 아날로그 공간은 많이 변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