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빈치 서거, 그 후 500년
지난여름 방문한 이탈리아는 굵직한 미술 행사로 가득 차 있었다. 베니스 비엔날레와 같이 동시대 미술을 만나볼 기회는 물론이고 서양 미술사를 장식한 예술가를 재조명하는 자리도 많았다. 그중 기억에 남은 것은 이탈리아 곳곳에서 열리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 서거 500주년 기념 전시들이었다. 고향인 빈치의 레오나르도 박물관에서는 다빈치를 연구하는 학회가 다음달 15일까지 열린다. 작가로 성장한 피렌체에서는 우피치 미술관, 대표작 ‘최후의 만찬’이 위치한 밀라노에서는 암브로시아나 미술관에서 전시를 개최했다.
#세기의 걸작 ‘최후의 만찬’과 ‘모나리자’가 탄생하기까지
#드로잉을 통해 보는 다빈치의 ‘과학적인 미술’
믿기 어렵지만 다빈치가 평생 남긴 회화 작품은 열다섯 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유명 작품들이 전부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는 주문 받은 일감을 끝까지 완성하지 못하는 일이 잦았다. 다양한 관심사를 가진 탓에 하나에 매달리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루에 스무 시간을 깨어 있었지만 그림을 그리다 곧 밀쳐 두고 기하학 문제를 풀거나 건축자재를 실험하기 일쑤였다.
이런 연유로 그가 남긴 것 중 회화는 일부고 드로잉이 대부분이다. ‘오른쪽을 향한 성모마리아의 옆모습’(1510∼1513)은 다빈치가 남긴 드로잉 중 특히 아름답다. 그는 하나의 작품처럼 보이는 이 드로잉을 완성하기 위해 분필과 목탄을 번갈아 사용했다. 목탄의 번짐으로 얼굴의 굴곡과 깊은 눈매 등 전반적인 분위기를 형성했다. 이후 상대적으로 딱딱하고 뾰족한 분필로 머리카락 등을 예리한 획으로 그어 완성했다.
다빈치가 자주 남긴 드로잉의 전형은 ‘성모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돌보는 장면을 그린 구성 스케치’(1480∼1485)에서 볼 수 있다.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 중인 ‘암굴의 성모’를 그리기 전에 사전 연구를 한 흔적이다. 대상이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다양한 모습을 남겼다. 드로잉의 우측 하단에 선을 그어서 만들어 낸 각도로 보는 이의 시각을 염두에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그는 과학적 근거를 토대로 그림을 그렸다. 사람과 동물을 그릴 때도 실제를 반영하기 위해 해부학을 공부했다. 직접 시체를 해부하고 장기를 세밀하게 관찰하고 스케치로 남기기도 했다. ‘모나리자’의 신비로운 미소가 어쩌면 안면 근육의 구조를 나타내는 과정에서 생겼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하는 이유다.
#이번 가을, 루브르 박물관에 가고 싶은 이유
다빈치는 프랑스로 삶의 터전을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예순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 1519년 5월2일의 일이었다. 다빈치는 자신이 머물던 클로 뤼세 성(城) 소유자의 팔에 안겨 숨을 거뒀다. 하지만 훗날 최초의 미술사가 중 한 명인 조르조 바사리 등에 의해 프랑수아 1세의 품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각색한 이 모습을 남긴 그림들이 여러 점 존재한다.
다빈치는 이렇게 누군가의 품에 안겨 생을 마감했다. 주변을 둘러싸고 지켜보는 이도 많았다. 그가 마지막 남긴 말은 “내가 해야 할 만큼의 예술을 해내지 못해 신과 인간들에게 죄를 지었다”였다. 그는 완성한 작품의 숫자로 평가할 수 없는 업적을 세상에 남겼지만, 어떤 죄책감에 시달렸던 것 같다. 더 완벽하기를 추구하는 천재적 인물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파리 루브르 미술관에서는 다음달부터 4개월간 다빈치 특별전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개최한다. 다빈치 서거 500주년 행사의 백미일 것이라 예상하며 사람들의 기대가 쏠리고 있다. ‘모나리자’등 루브르 소장품 외에도 런던, 아부다비 등으로부터 회화를 빌려온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22점의 드로잉도 함께 선보일 예정이다.
이제 여행의 맛에서 벗어나 현실에 집중할 때가 지났는데도 이 이야기를 들으니 어느새 파리행 비행기를 찾게 된다. 아마 가지 못하겠지만 전시장 한가운데 서서 다빈치의 회화에 둘러싸여 있는 생각만 해도 아찔한 감동이 몰려온다. 가을 파리에 여행을 간다면 꼭 권하고 싶은 전시다.
김한들 큐레이터, 국민대 미술관·박물관학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