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세계] 해방 귀국선 ‘우키시마호 폭발 사고’를 아십니까?

지난 19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우키시마호. 사진은 개봉 전 공개된 예고편 영상. 영상 캡처

해방 후, 일제 강제징용자와 가족들을 태우고 우리나라로 돌아오다 해상 폭발로 침몰한 일본 군함 ‘우키시마호(浮島丸·4730t) 사고’의 슬픔이 수십년째 씻기지 못하고 있다. 유족들은 일본 정부로부터 사고와 관련해 어떠한 사과도 받지 못했다며, 자신들이 세상을 떠나면 누가 뒤를 이어 희생자의 한(恨)을 달래느냐고 울분을 토한다.

 

◆출항 이틀 만에 폭발한 우키시마호…‘524명 vs 3000여명’ 엇갈리는 사망자 집계

 

우키시마호의 비극은 1945년 8월22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인 강제징용자와 가족 등을 태우고 그날 오후 10시쯤 아오모리(青森)현 오미나토(大湊)항을 떠난 배는 출항 이틀 후인 24일 오후 5시쯤 교토(京都) 마이즈루(舞鶴)만에서 폭발로 침몰했다.

 

반으로 쪼개진 배는 선수와 선미가 바다로 들어간 ‘팔(八)’자 모양이었다가 양 끝이 하늘로 치솟는 ‘브이(V)’ 형태로 17m 바다 아래에 가라앉았다. 집에 간다는 기쁨으로 배에 올랐던 비행장, 철도공사장 등의 징용자들은 결국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일본 오미나토 해군시설부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우키시마호 사몰자명부(사망자명단)’. 해당 페이지는 1989년 현지에서 발행된 우키시마호 사건기록에서 일부 발췌한 것. 우키시마호 유족회 제공

일본 정부는 그해 11월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우키시마호 사몰자명부’에서 조선인 탑승자는 3735명에 사망자는 524명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유족과 관련 단체는 당시 ‘재일조선인연맹’의 조사자료를 근거로 조선인 탑승자는 6500~8000명에 사망자는 일본 발표보다 훨씬 많은 3000여명이라고 반박한다. 미 해군의 기뢰(機雷)가 폭발 원인이라는 일본 주장에 유족 등은 일본 해군의 고의 폭발이라고 맞선다.

 

◆목적지는 부산인데…日 해안선 따라 남하한 배

 

유족은 부산을 향해 동해를 가로지르지 않고, 해안선 따라 남하한 점을 고의 폭발 근거 중 하나로 제시한다. 애초 조선에 갈 생각이 아니었다면서, 일부러 만으로 진입해 사고를 일으켰다는 거다.

부산 중구 수미르공원에서 열린 ‘우키시마호 폭침 희생자 합동위령제’에 참여한 시민들. 사진은 2014년 8월 촬영. 연합뉴스

국무총리실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 위원회’도 2010년 12월 내놓은 침몰 진상보고서에서 ‘촉뢰(기뢰 등에 의한 폭발)가 원인’이라는 일본 발표를 인정하기에는 여러 의혹이 있다고 지적했다. 위원회는 보고서에서 공식 접수된 생존자가 65명이라고 밝혔다.

 

폭발로 숨진 일본 승조원은 25명(탑승은 255명)이었다. 조선인 보복 등이 두려워 탑승을 거부하던 승조원들이 바뀐 목적지(부산→마이즈루)를 알고 승선했다는 말이 있지만 공식 확인된 내용은 아니다.

 

◆“우리가 떠나면 누가 희생자 한(恨) 달래려나”

 

우키시마호 사고 유족들은 배상 문제에서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일청구권 협정(1965년 체결)’과 관련해 정부가 ‘청구권 자금의 운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을 이듬해 제정했지만, 1945년 8월15일 이전까지의 일본에 대한 민간 청구권만 법이 정하는 자금에서 보상한다고 규정해서다. 이에 유족은 사고 시기를 이유로 우키시마호 폭발이 논외가 됐다고 억울함을 호소한다.

우키시마호 폭발사고 생존자들이 남산 영화진흥원에서 열린 희생자 합동위령제에 참석해 고인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사진은 2001년 8월 촬영. 연합뉴스

2001년 당시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도 진상규명 요구 단체가 제출한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보상에 관한 진정’ 답변에서 “사건은 1945년 8월15일 이후 발생해 한일청구권 협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며 “일본의 귀책사유가 입증될 경우 일본 정부의 보상 또는 배상책임을 충분히 물을 수 있는 사안으로 생각된다”고 밝혔다.

 

한일청구권 협정은 정치적인 해석이며, 개인의 청구권에 적용될 수 없다고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일본제철(옛 신일철주금)과 미쓰비시중공업 등의 배상 명령을 내린 대법원 판결은 유족에게 다른 나라 이야기다.

 

지난 19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우키시마호’가 그나마 작은 위안이다. 조선인의 강제동원 피해사실을 짚고, 일본의 진실 은폐와 축소를 지적한 이 작품은 대중에게 낯선 우키시마호 폭발을 다뤘다는 점에서 호평을 얻는다.

우키시마호의 항로.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 위원회 제공

한편, 일본의 사과를 받고자 인생을 바치다시피 뛰어온 한영용(76) 우키시마호 유족회 회장은 “(우리가) 세상을 떠나면 누가 희생자들의 한(恨)을 달래줄 수 있겠느냐”고 울분을 토했다. 지난 19일 만난 그는  아들에게서 들은 “(사고와 관련한) 자료들을 모아두세요”라는 말이 한 줄기 희망이었다고 밝혔다.

 

김동환 기자 kimcharr@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