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부 블랙리스트’ 재판부, 검찰 공소장에 “왜 빠졌나” “왜 적었나”

“피고인들이 텔레파시로 이 사건 범행을 저지른 게 아니고서야…”

 

“판사 생활을 20년 했지만 업무방해죄에 이렇게 대화 내용이 상세히 나오는 공소사실을 본 적이 없습니다.”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 연합뉴스 자료사진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 등의 ‘환경부 블랙리스트’ 의혹 관련 재판을 맡은 재판부가 첫 재판에서 검찰 공소장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공소장 변경을 요청했다. 공소장에 정작 필요한 내용은 빠져있고, 불필요한 내용이 많다는 취지다.

 

30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5부(부장판사 송인권)는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와 업무방해 등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김 전 장관과 신미숙 전 청와대 균형인사비서관에 대한 첫 공판준비기일을 열었다. 기소된 지 5개월 만에 열린 이날 재판에서 재판부는 20여분 동안 검찰의 공소장 내용을 비판했다. 공판준비기일엔 피고인 출석 의무가 없어 김 전 장관과 신 전 비서관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

 

먼저 재판부는 공소사실에 실행행위자가 된 환경부 공무원이 공동정범인지, 혹은 고의가 없는 간접정범인지에 대한 내용이 공소장에 누락됐다고 봤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텔레파시로 지시한 게 아니라면 환경부 공무원들을 통해 지시한 것이고, 이들의 행위가 없었다면 범행 성립 여지도 없다”면서 “해당 공무원들의 행위가 범행의 본질적 구성인데도 이들에 대해 아무런 형법적 평가가 내려지지 않았다”고 했다.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에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공동정범으로 기소된 것과 달리 이 사건에선 실제로 범죄행위를 한 사람에 대한 평가가 빠져있다는 것이다.

 

이어 피고인들의 지시를 받은 공무원들이 업무방해 혐의 피해자로 되어있는 것도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해당 공무원의 행위가 없었다면 업무방해죄가 성립할 수 없는데, 피해자로 기재돼있는 건 공소사실 구성이 적절한지 의문이 든다”고 꼬집었다.

 

또 재판부는 ‘공소장 일본주의’에 위배될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다. 공소장 일본주의란 ‘검사가 기소할 때 원칙적으로 공소장 하나만을 제출해야 하고 재판부가 예단을 갖게 할 수 있는 기타 서류 등을 첨부·인용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말한다.

 

재판부는 “공소사실 자체가 지나치게 장황하고 산만하며 피고인들에 대해 안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기재돼있다”고 비판했다. 대화 내용을 직접 인용하면서 화를 냈다거나 전화를 받지 않았다는 등의 내용을 공소장에 적은 것은 불필요할 뿐 아니라 피고인에게 선입견을 줄 내용이 공소장에 포함됐다는 취지다.

 

이어 피고인들이 상법상 일반 회사의 대표이사 임명에 관여한 것이 이들의 직무 권한에 해당하는지, 김 전 장관이 부하들에게 부당 전보에 대한 기안을 작성하게 시킨 것을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로 처벌하는 것이 정당한지도 검토해보라고 했다. 재판부는 검찰에 다음 준비기일까지 공소장을 수정하거나 관련 의견서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2차 공판준비기일은 다음달 29일 열린다.

 

 

김 전 장관은 2017년 6월부터 이듬해 11월까지 환경부 산하 공공기관 임원들의 명단을 만들어 동향을 파악하도록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또 환경부 공무원들을 동원해 합리적 사유 없이 공공기관 임원들에게 사표를 제출하도록 하고, 그 자리에 후임자 임명을 위해 환경부 장관의 인사권 및 업무지휘권 등을 남용한 혐의도 받는다. 김 전 장관은 추천 후보자가 서류심사에서 탈락하자 담당 공무원을 크게 질책한 것으로 조사됐다. 신 전 비서관은 환경부 산하기관 인사선발 과정에서 청와대 내정 후보가 탈락하자 부처 관계자를 불러 경위를 추궁하는 등 부당 개입한 혐의를 받는다.

 

앞서 환경부 블랙리스트 의혹은 청와대 특별감찰반 시절 민간인 불법사찰 의혹 등을 주장한 김태우 전 검찰 수사관의 폭로로 불거졌다. 김 전 수사관은 지난해 12월 “특감반 근무 당시 환경부에서 8개 산하기관 임원 24명의 임기와 사표 제출 여부가 담긴 ‘환경부 산하기관 임원들 사퇴 동향’ 문건을 받아 청와대에 보고했다”고 주장했다. 해당 문건에는 사표 제출 여부뿐 아니라 ‘현 정부 임명’, ‘새누리당 출신’ 등 거취가 담겨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유지혜 기자 keep@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