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 미제사건 해결 불구 / 혈액형 분석 등 초동수사 부실 / 6차 사건 땐 유력용의자 지목 / “그동안 무엇 했나” 비난 쏟아져
경찰이 이름만 들어도 몸서리쳤던 ‘화성연쇄살인사건’의 범행을 33년 만에 자백받고도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다. 용의자 이춘재가 군 제대 후 8년여간 화성사건을 포함해 모두 15건의 성폭행·살인과 30건의 강간·강간미수 등 믿기 어려운 범행을 자백하자, ‘경찰은 그동안 무엇을 했느냐’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3일 경기남부경찰청 수사본부에 따르면 이춘재는 군대에서 전역한 1986년 1월부터 처제를 성폭행하고 살해한 뒤 검거된 1994년 1월까지 8년 사이에 40여건에 이르는 강력 성범죄를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이춘재가 8년간 화성을 기점으로 수원, 충북 청주를 오가며 저지른 희대의 성범죄에 대해 전문가들은 경찰의 초동수사 실패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경찰이 30년 만에 국내 최대의 미제사건을 해결하고도 ‘잡은 것도 경찰, 놓친 것도 경찰’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는 이유다.
경찰은 화성사건이 빈발하던 30여년 전 3번이나 이춘재를 용의선상에 올렸다. 하지만 범인으로 특정하는 데 실패해 번번이 수사망을 빠져나가게 했다. 주민 제보에 의해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던 6차 사건 수사는 특히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1987년 5월2일 이춘재의 거주지인 태안읍 진안리에서 20대 여성이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 이후 주민들은 동태가 이상한 그를 용의자로 제보했고 경찰은 유력용의자로 지휘부에 보고까지 했다. 그러나 경찰이 추정한 혈액형과 실제 이춘재의 혈액형이 달라 유력 용의자로 특정하지 못했다. 이후 9, 10차 사건 때 또 이춘재를 용의자로 올렸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혈액형 분석이 왜 틀렸는지에 대해 경찰은 입을 다물고 있다.
1988년 발생한 수원여고생 살인사건도 아쉬움을 더한다. 1987년 12월24일 여고생 김모(당시 18세)양이 실종됐다가 열흘가량 뒤인 1988년 1월4일 수원 화서역 인근 논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김양은 양 손이 스타킹으로 결박된 채 입에는 흰색 러닝셔츠로 재갈이 물렸고 추행 흔적도 발견됐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과 비슷한 범행 행태였다.
이듬해인 1989년 7월엔 수원시 오목천동의 한 야산 밑 농수로에서 또 다른 여고생이 숨진 채 발견됐다. 알몸으로 폭행당하고 흉기에 찔린 상태였다. 두 사건의 범행 현장은 화성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한 화성군 태안읍·정남면과 7∼10㎞ 정도 떨어진 곳이다.
화성사건과의 연관성이 제기되자 수원과 화성의 관할 경찰서가 형식적인 공조에 나섰지만 이춘재가 아닌 다른 용의자가 조사과정에서 숨지자 사건을 흐지부지 마무리했다. 마지막 범행인 15번째 청주 처제살해 때도 이춘재가 용의자로 특정됐지만 관할 문제 등을 이유로 공조수사가 이뤄지지 않아 화성사건과의 연관성은 또다시 덮였다.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이수정 교수는 “범행은 점점 더 심해지는 데도 체포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춘재에게 굉장한 의미 부여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