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에 사람들은 영화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모두들 스포츠에만 관심이 많았습니다. 영화감독은 혼자서 죽어 버렸습니다.”
영화 ‘바보선언’(1983)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바로 도입부에서 한 아이의 내레이션이 흐르는 가운데, 이장호(74) 감독이 직접 연기한 한 영화감독이 누추한 차림새로 빌딩 옥상에서 투신 자살하는 장면이다. 미래의 아이가 그처럼 ‘옛날 옛적 한국에서’ 그러했다는 식으로 또박또박 얘기하는 가운데,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와 영화계를 마치 저주하고 자학하듯 완성한 이 장면은 블랙코미디라고 말하기에도 지나치게 서글프고 독설적인, 바로 1980년대 한국 사회와 영화를 대표하는 기념비적인 장면이다. 심지어 행려처럼 보이는 주인공 동철(김명곤)은 아무런 애도도 없이 그 죽은 영화감독의 옷과 시계와 신발까지 가져간다. 심의와 검열로 만신창이가 된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으로 대중에게 아무런 위안도 주지 못하던 시대, 예술이 사회 현실을 담아내지 못하던 시대, 그런 식으로라도 예술가가 대중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다행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 영화감독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렇게 이 영화를 만든 영화감독이 죽고 영화가 시작된다.
◆시대가 낳은 자포자기의 미학
◆당대의 현실과 조우한 ‘한국영화 뉴웨이브’
이장호 감독이 그렇게 되기 전, ‘별들의 고향’(1974)으로 당대 최고의 흥행감독으로 떠올랐던 그의 작가적 전환점이라 부를 만한 ‘바람 불어 좋은 날’(1980)을 잠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은 당시 한국영화계의 사회 비판적 리얼리즘 대표작으로, 한국영화의 현실 인식이란 측면에서 후배 감독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앞서 등장한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1975)과 더불어 한국영화가 억압적인 시대상을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만 결정적인 차이점이라면 ‘바보들의 행진’은 연일 휴학이 이어지고 있는 황량한 캠퍼스의 대학생들이 주인공이고, ‘바람 불어 좋은 날’은 이제 막 서울로 올라와 어렵사리 일자리를 구한 시골 청년들이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이장호 감독은 1970년대 후반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를 겪고 있는 서울을 배경으로 중국집 배달원 덕배(안성기), 이발소 견습생 춘식(이영호), 여관 종업원 길남(김성찬)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 경제개발의 이면에서 빈곤과 소외가 공존했던 현실을 날카롭게 포착했다.
‘이장호 vs 배창호’를 쓴 영화평론가 김영진은 이에 대해 “‘바람 불어 좋은 날’은 1980년대에 대학가를 중심으로 불어닥쳤던 민중영화의 개념에 어떤 영감을 제공했던 작품이다. 이 영화는 어떤 운동권 영화보다 더 직설적으로 ‘민중’의 삶을 건드린다”고 보았다. 그 ‘영감’은 한국영화계로도 이어졌다. 화려한 아역배우 시절을 뒤로한 채 연기를 그만두고 살던 안성기가 심사숙고 끝에 ‘바람 불어 좋은 날’을 복귀작으로 선택했고, 이후 이장호 못지않은 당대를 대표하는 감독이 된 배창호 감독은 조감독으로 일했다. 이후 ‘성공시대’(1988) ‘우묵배미의 사랑’(1990) 등을 만들게 되는 장선우 감독, 역시 이후 ‘칠수와 만수’(1988) ‘그들도 우리처럼’(1990) 등을 만들게 되는 박광수 감독이 그를 찾아와 연출부를 자청했다. ‘상계동 올림픽’(1988) ‘송환’(2003) 등을 만들며 한국 다큐멘터리 역사를 대표하는 김동원 감독 또한 이장호 감독의 연출부 출신이다. 그렇게 이장호 감독의 존재는 바로 지금의 후배 영화감독들에까지 도도하게 이어지는 ‘한국영화 뉴웨이브’의 기점으로 자리한다.
◆1980년대라는 암흑기, 비극과 해학은 닮았다
그런 점에서 ‘바보선언’의 두 주인공 동철과 육덕도 얼핏 보아 ‘바람 불어 좋은 날’의 젊은 주인공들이 다시 등장한 것처럼 보이지만, ‘바보선언’은 더 멀리 나아간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이 당시 시대상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서울이란 각박한 도시에서 꿈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희로애락을 담아내고자 했다면, ‘바보선언’은 도입부의 그 단호한 자살처럼 아무런 희망도 찾아볼 수 없다. 이에 대해 ‘한국영화 전복의 감독 15인’을 쓴 영화평론가 김수남은 “‘바람 불어 좋은 날’의 주체적 인간관은 ‘바보선언’에 이르러서 민중미학적 진보적 리얼리즘으로 성숙해 영화 형식미 자체도 급진전한다”고 보았다. 어쩔 수 없었던 그 자포자기의 미학이 사실은 그를 더 진화시켰던 것이다. ‘비극적인 해학’이라는 일견 모순된 표현이 가능한 당대 유일한 한국영화였다고나 할까. 그런데 영화가 만들어진 1983년은 바로 KBS가 6월30일부터 11월14일까지 무려 138일에 걸쳐 453시간 45분 동안 생방송으로 이산가족찾기 특별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해이기도 하다. 영화보다 더한 드라마가 극장이 아닌 TV에서 펼쳐지던 때였다. 그처럼 영화다운 영화를 만나기 힘들었던 그때, ‘바보선언’은 1980년대라는 어둠 속에서 한국영화가 여전히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는 증거와도 같은 작품이다.
주성철 씨네21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