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악’을 거쳐야 어른이 된다" 뮤지컬 다윈 영의 악의 기원

소년은 결국 ‘악’이란 통과의례를 거쳐야 어른이 된다. 요절한 작가 박지리의 작품을 무대 위로 옮긴 뮤지컬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의 한 장면.          서울예술단 제공 

대중예술에서 우리가 구하는 건 일상의 번잡함에서 벗어난 잠깐의 즐거움과 감동이다. 하지만 때로는 작품이 던지는 묵직한 화두에서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할 때도 있다. 영화 ‘기생충’이 그랬고 최근에는 영화 ‘조커’가 악인의 탄생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뮤지컬 ‘다윈 영의 악의 기원’도 마찬가지다. 겉으로는 안정적인 사회와 가정 속에 숨어있는 악의 씨앗이 과연 어디에서 심어진 것인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한다.

 

이 뮤지컬은 원작자 박지리를 떼놓고 말할 수 없다. 요절한 작가 박지리는 첫 소설 ‘칼의 노래’로 김훈이 받았던 “한국문학에 벼락처럼 쏟아진 축복”이란 찬사에 어울릴만한 또 다른 소설가. 따로 글쓰기를 배운 적도 없다. 대학 졸업 후 취업도 안 되고 할 일이 없어 이것저것 써보다 한 달 만에 난생처음 ‘합체’란 소설을 완성했다. 이 작품으로 사계절문학상 대상을 받으며 25세에 등단했다. 이후 단 7편 작품으로 문단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고 31세에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박지리의 대표작은 ‘다윈 영의 악의 기원(악의 기원)’. 1구역부터 9구역까지 철저하게 구분된 가상의 계급사회에서 벌어지는 주인공 다윈 영 가문 3대에 걸친 생존을 위한 선택과 원죄, 구원을 다룬 문제작이다. 이 작품에 상을 준 한국출판문화상측은 “세계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도전적 걸작”이란 극찬을 했다.

 

무려 856쪽에 달하는 두꺼운 이 소설을 서울예술단이 지난해 용감하게 창작 뮤지컬로 만들었다. 호평에 힘입어 1년만인 지난 16일 다시 재연이 시작됐는데 초연 제작진과 출연진 그대로다. 혜성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작가의 유작(遺作)이 이들을 똘똘 뭉치게 만들었다. 권호성 서울예술단 예술감독은 “작품의 선택, 선택에 대한 검증, 검증에 따른 수익성 분석, 재원마련, 제작진 구성과 캐스팅을 거쳐 공연에 이르기까지 셀 수 없는 선택과 판단, 그리고 충돌과 합의를 통해 한 작품이 겨우 무대에 오를 수 있다”며 “그런데도 다시는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작품이 훨씬 많다. ‘악의 기원’은 이러한 어려움을 뚫고 다시 무대에 오른다. 긴 생명을 불어넣고자 많은 사람이 다시 모여 다듬고 보완했다”고 설명했다.

 

재연 무대에 오른 ‘악의 기원’은 방대한 원작을 필연적으로 과감하게 압축했다. 악의 씨앗이 뿌려진 60년 전 폭동의 날과 30년 전 주인공 아버지 세대 이야기는 현재 다윈 영과 그 친구들이 풀어나가는 이야기에 결정적 장면만 삽입된다. 시즌제 드라마로나 적합할 방대한 내용을 두 시간 반 남짓한 시간에 담으려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하지만 주인공 ‘다윈’이 악의 씨앗을 품게 된 결정적 사건을 만든 아버지 세대 ‘니스’, ‘제이’, ‘버즈’의 애증과 갈등, 다윈의 할아버지 ‘러너’는 어떻게 혁명을 포기하게 됐는지 등이 대폭 생략된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그럼에도 ‘악의 기원’은 다윈의 선택을 통해 ‘가족’이라는 혈연공동체를 보호하려는 생존본능이 어떻게 순수한 영혼을 지배하게 되는지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60년 전 할아버지 때 뿌려진 악의 씨앗이 결국 아들에서 손자에게로 이어지는 결말에서 던지는 질문은 ‘악의 기원은 무엇인가’다. 극 중 니스는 ‘종의 기원’에 집착한다. 서가 맨 앞에 항상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꽂아놓고 네트워크 아이디도 ‘종의 기원’이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인식의 대전환을 가져온 이 책은 ‘종을 이루는 개체는 생존 경쟁이 불가피하며 경쟁에서 이긴 형질은 후대로 이어진다’로 선언한다. 극 중 영 가문 3대는 대단원에 이르러 “죄를 지은 아이는 어른이 된다”고 노래한다. 누구든 크고 작은 죄 없이는 어른이 될 수 없고 살아남을 수 없다. 악은 결국 생존 자체에 내포된 씨앗이라고 이 뮤지컬은 주장한다.

 

억압과 차별이 제도화된 사회구조도 또 다른 악의 기원으로 제시되기는 한다. 애초 영 가문 원죄의 굴레가 시작된 ‘12월 혁명’은 상위계급이 하위계급을 억압하는 폭력적 사회구조가 초래한 사건이다. 하지만 혁명에 앞장섰던 러너는 혁명 지도부 역시 권력만을 추구하는 또 다른 억압자임을 알아채고 이들을 붕괴시킨 후 혁명 전선에서 이탈한다. 인간과 사회를 추동하는 힘은 결국 이성이나 사회진보를 위한 인간의 노력이 아닌 인간의 원초적 욕망에서 나오며 그 자체가 악의 기원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한없이 무겁기만 할 수 있는 무대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며 뮤지컬로서 완성도를 높여준 건 독자적 음악 세계를 구축해 온 박천휘의 음악이다. 뮤지컬 작사·번역으로도 유명한 박천휘는 다양한 분위기 음악을 선보이며 무대를 다채롭게 꾸몄다. 장면에 맞게 그레고리안 성가에서부터 가요 발라드, 운동권 가요 등을 독창, 이중창, 삼중창 등에 자유자재로 갖다 썼다. 1,2막을 각각 마무리하는 ‘악의 기원’과 ‘푸른 눈의 목격자’,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리’는 인간 심연의 어둠을 비추는 탁월한 작품이다. 원작을 읽은 이라면 다윈의 답안지와 루미의 선택 등 뮤지컬과 원작의 차이점을 음미하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이 된다.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