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규칼럼] 혼돈의 세계, 외교의 과제

미국 ‘세계경찰’ 역할 포기 선언 / 국제질서 무너뜨리는 일 나서 / 한·미동맹 이완, 한·일갈등 악화 / 외교의 시대적 과제 되새길 때

국제질서가 혼돈에 빠져들고 있다. 진원지는 국제질서를 주도해온 미국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보호무역주의를 내세워 중국·유럽연합(EU) 등 주요국과 갈등을 일으킨 데 이어 이번엔 미국 우선주의와 고립주의를 내걸고 미국의 ‘세계 경찰’ 역할 포기를 선언했다. “미군은 오직 중대한 국가적 이익이 걸려 있을 때만 싸울 것”이라고 했다. 시리아 주둔 미군 철수 결정으로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조직 이슬람국가(IS) 격퇴전의 동맹인 쿠르드족을 내버렸다. 미국이 기존 국제질서를 무너뜨리는 일에 나선 것이다.

박완규 논설실장

우리가 알던 미국이 아니다. 한국에는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대폭 증액을 요구해 방위비 분담금 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다. 우리의 안보 기반인 한·미동맹이 위태롭다는 우려를 낳는다.

이런 와중에 주변국 강성 지도자들은 자국 이익을 내세우면서 한반도 주변 정세를 흔들고 있다. 우리에겐 심각한 외교적 도전이 아닐 수 없다.



북한은 스톡홀름 북·미 비핵화 실무협상 결렬 이후 자력갱생을 부쩍 강조한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백마를 타고 백두산에 올라 중대 결단을 예고했다. 삼지연 건설 현장에서는 미국의 “집요한 제재와 압살 책동”에 대한 “인민의 분노”를 언급했다. 이어 금강산 관광시설을 현지지도하면서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지는 너절한 남측 시설들을 남측의 관계 부문과 합의하여 싹 들어내도록 하고 우리 식으로 새로 건설해야 한다”고 했다. 북한은 금강산 남측 시설 철거 문제를 문서 교환 방식으로 협의하자는 내용의 통지문을 보냈다. 새로운 유형의 대남 도발이다. 우리 정부는 “남북관계를 훼손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남북 당국 간 실무회담을 열자고 제안했지만 성사 가능성은 불투명하다.

한·일 갈등은 문제의 발단인 한국 대법원의 강제동원 배상 판결이 내일로 1년을 맞지만 여태껏 완화될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 지난주 이낙연 국무총리가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만난 자리에서는 한·일 청구권협정 준수에 관한 일본의 단호한 입장만 확인했다. 우리 정부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종료 결정은 한·일, 한·미 관계에 이중 악재로 작용한다. 한·일 갈등이 더 심화되지 않도록 상황을 관리하면서 양국 정상회담을 통한 해법 마련을 모색하는 게 시급한 과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중국·러시아는 잇따라 군용기를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에 보내 느슨해진 한·미동맹과 한·미·일 안보협력체제를 시험하고 있다.

모두 대처하기 어려운 문제들이다. 국제질서 혼돈으로 드러나는 문제점들이 한반도에 집중되고 있다. 예사롭지 않은 일이다. 리처드 하스 미국 외교협회(CFR) 회장은 저서 ‘혼돈의 세계’에서 아시아·태평양지역에 대해 “강력한 국가, 상충하는 영유권 주장, 민족주의적 정서의 대립, 역사적 앙금, 외교적 장치와 틀의 부재 등으로 인해 도전이 있을 수 있다. 유사한 사례를 찾아보자면 1차 세계대전 이전 유럽을 꼽을 수 있다”고 했다. 하스가 열거한 아태지역의 도전 양상들은 지금 우리의 외교 현안들이다.

1914년 독일의 벨기에 침공을 하루 전에 알게 된 에드워드 그레이 영국 외무장관은 런던 화이트홀 집무실 창가에 서서 저물어가는 도시를 보며 유명한 말을 남겼다. “유럽 전역에서 등불이 꺼져가는구나. 우리는 그것들이 다시 밝혀지는 것을 일생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을 예고한 말이다. 외교가 실패했다는 뜻이다. 세계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1945년까지 전쟁 참화에 시달렸다.

우리 외교 당국자가 그레이의 말을 되풀이하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으리라 믿는다. 한·미는 동맹 관계도 지켜낼 것이다. 양국 모두 동맹 유지가 국익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어선 안 된다. 다방면의 도전을 이겨내려면 먼저 우리 외교가 달라져야 한다. 외교 당국은 당면 도전에 대처하는 전략을 정교하게 짜야 한다. 창의적이고 영민한 외교활동으로 외교 공간을 넓혀나가야 한다. 그래야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 외교의 시대적 과제가 무엇인지부터 되새기기 바란다.

 

박완규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