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외치던 푸른 눈의 헐버트, 개화기 韓 문명화의 선구자” [나의 삶 나의 길]

(사)헐버트 박사 기념사업회 김동진 회장 / 63년간 한민족과 함께한 독립운동가 / 대학 시절 그의 책 접한 뒤 흠모하다 / 뉴욕서 근무 중 우연히 손자 만나 매료 / 명성황후 시해 직후 고종 침전서 불침번 / 을사늑약 무효·대한제국 국권회복 외쳐 / “한글과 견줄 문자는 없어” 전용 주창도 / 30년 연구의 결정판 ‘헐버트의 꿈…’ 출간 / 그의 숭고한 노력 사람들에 알리고 싶어 / 외국인 독립운동가 예우 방안 마련돼야
우리 민족 역사의 고비에는 기억해야 할 이들이 많다. 특히 서양 문명과 맞닥뜨렸던 개화기와 나라의 주권을 잃었던 일제강점기에는 더더욱 잊지 말아야 할 인물이 많다. 안중근·윤봉길·주시경·유관순·김구…. 그런데 우리나라와는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이방인이면서 일제의 침략주의에 맞서 우리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이들도 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미국인 호머 B 헐버트(1863∼1949) 박사다. 헐버트 박사는 23세 때 조선을 만나 생을 마감할 때까지 63년을 한민족과 영욕을 같이한 외국인 독립운동가다.
(사)헐버트 박사 기념사업회 김동진 회장은 지난 21일 세계일보와 인터뷰에서 “국민, 특히 청년들이 ‘한국인이라면 헐버트를 하루도 잊어서는 아니 된다’라는 안중근 의사의 말씀대로 헐버트 박사가 한민족에게 어떤 인물일까를 한 번쯤 되새겼으면 한다”며 “정부가 외국인 독립운동가에 대한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이들을 재평가해 ‘은혜를 잊지 않은 민족’임을 국제사회에 알릴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서상배 선임기자

대학 시절 그의 책을 접하고 흠모하다 미국 뉴욕에서 외국계 은행에 근무하던 중 우연히 그의 손자를 만나 그의 삶에 매료돼 그의 업적을 연구해온 이가 (사)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김동진(69) 회장이다. 그는 “헐버트 박사는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고종의 밀사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민족의 은인인데도 요즘은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며 안타까워한다. 대한매일신보를 발행한 영국 출신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이나 ‘3·1운동의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리는 캐나다 출신 프랭크 스코필드보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최근 그가 ‘은혜를 잊은 민족이 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헐버트의 생애를 다룬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를 출간했다. 그의 헐버트 연구 30년 결정판인 셈이다.

헐버트 박사. 김동진 회장 제공

지난 21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뒤편 주시경마당에서 그를 만났다. 주시경마당은 개화기 국어학자인 주시경의 한글사랑을 기리는 공간이다. 이곳에는 주시경 선생과 함께 헐버트 박사의 조형물(부조상)도 있다. 그래서 김 회장에게는 각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그는 “이제라도 개화기 헐버트 박사님의 한국 사랑을 제대로 조명하고 합당한 예우를 해야 한다”며 인터뷰 내내 목청을 높였다.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를 출간한 동기는. 사실 헐버트 박사가 어떤 분인지를 모르는 이들이 많다.

“헐버트 박사는 개화기 한국 문명화의 선구자이자 우리 독립운동의 횃불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헐버트란 이름은 우리 국민에게 여전히 낯설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헐버트 박사 서거 70주기를 맞아 잘 알려지지 않은 헐버트 박사의 한국 사랑을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책을 냈다. 개화기 한국 역사에 그의 손길이 안 닿은 데가 없다. 한글사랑은 놀랄 만큼 뜨거웠다. ‘한글과 견줄 문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며 한글 전용을 주창한 분으로,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를 출간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직후 고종의 침전에서 불침번을 섰던 인물도 그였고, 을사늑약을 저지하기 위해 1905년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을 방문한 고종황제의 대미특사도 그였다. 1907년 이상설 등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로 참석, 각국 외교관과 현지 언론에 을사늑약의 무효와 대한제국의 국권 회복을 호소하자 이를 뒤에서 적극 도왔다. 일본은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눈엣가시 헐버트 박사를 한국에서 추방했다. 그는 고국에 돌아가서도 기고를 통해 한국 독립을 주장했다. 이후 정부 초청으로 40년 만인 1949년 7월29일 한국에 돌아왔으나 불과 일주일 후 세상을 떠났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생전 그의 소망에 따라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30년을 그의 업적을 연구하고 있는데 알면 알수록 고개가 숙여지는 분이다.”



-헐버트 박사를 알기 전까지 외국계 은행에서 ‘잘 나가던’ 금융인으로 살아왔는데.

“1978년 미국 케미칼은행에 입사해 30여년을 국제금융인으로 일하며 제이피모건은행 한국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재직 중 외국의 선진 금융기법 도입에 나름 노력했다. 미국의 C/P, 후순위채 등 선진 금융기법을 처음 우리나라에 소개했다. 외환위기 때 해외채권단 대표로 활동한 일은 지금 돌이켜 봐도 뿌듯하다. 특히 후순위채를 ‘후순위채’로 부를까 ‘차순위채’로 부를까 고심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우리나라가 많은 외자가 필요한 시기였기에 국제금융기관을 통해 한국 기업과 금융기관에 외자를 주선한 일도 자부심으로 남아 있다. 미국의 주요 은행이었던 체이스맨해튼은행에서 최초의 한국인 대표로 임명되었던 순간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헐버트 박사가 관립중학교에서 대수학을 가르치고 있다. 김동진 회장 제공

-헐버트 박사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있나. 20년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를 이끌어 오고 있는데.

“대학 재학 때 헐버트 박사가 쓴 ‘대한제국의 종말’을 읽고 조선이 왜 망했는지와 이방인인 그의 조선과 조선인에 대한 깊은 사랑을 알게 됐다. 1989년 미국 은행 뉴욕 본사에 근무할 때 우연히 헐버트 박사의 손자를 만난 후 그의 삶에 매료됐다. 헐버트 박사 연구가 하나님이 나에게 내린 소명이라는 생각을 했다. 은행 일을 하면서도 시간을 내 그에 관한 자료를 찾는 일에 몰두했다. 박사님에 관한 자료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어느 날 뉴욕 컬럼비아대 도서관 지하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헐버트 박사 관련 자료를 찾다가 힘이 들어 막 나가려다 선반 모서리를 건드려 책을 떨어트렸다. 책을 주워 담다가 발견한 ‘한국어가 영어보다 우수하다’는 헐버트 박사의 글을 발견했다. 당시 희열은 잊지 못한다. 그 후로 그의 삶에 푹 빠졌다. 내 평생의 과업으로 생각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의 헐버트 박사에 관한 최초의 언급 등 그간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자료들도 발굴했는데.

“안중근 의사가 1909년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뤼순감옥으로 이송된 뒤 일본 경찰에게 ‘한국인이라면 헐버트를 하루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공술한 내용이 담긴 일본 통감부 비밀문서를 발굴했다. 두 분은 당시 만난 적이 없다. 그런데도 안중근 의사가 당시 헐버트의 우리 민족을 위한 헌신 등을 충분히 알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미국 뉴욕에서 발행되던 ‘뉴욕트리뷴’(New York Tribune·당시 뉴욕에서 최대 부수의 신문)지에 헐버트 박사가 1889년에 기고한 ‘조선어’(The Korean Language)라는 글도 발굴했다. 이 글은 조선 말글에 대한 최초의 국제적 소개이자 한국어에 대한 최초의 언어학적 고찰이다. 헐버트 박사가 1910년 8월29일 한일 강제병합 소식을 듣고 일본에 분개해 미국 신문에 “일본 외교는 속임수가 전부다. 모든 나라는 일본의 사기 외교에 속지 말아야 한다”고 호소한 기고문도 발굴했다. 서거 한 달 전인 1949년 7월 “한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민족”이라고 미국 기자와 회견한 내용을 발굴했을 때는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폄훼했지만 박사님은 우리의 저력과 잠재력을 알아보고 무한한 자긍심을 심어주셨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49년 헐버트 박사 사회장 영결식에서 추모사를 하고 있다. 김동진 회장 제공

-평소 우리를 도운 외국인 독립운동가들의 은혜를 잊어선 안 된다고 자주 언급했는데.

“개화기에 많은 외국인이 이 땅에서 활약했다. 그중에서도 한국의 주권을 수호하고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에 나선 분들은 꼭 기억해 줘야 한다. 이들은 이해관계를 떠나 순수하게 정의와 인간애의 바탕에서 우리 독립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지금 대한민국으로부터 서훈된 외국인 독립유공자는 70명이다. 이들 70명 중 임시정부가 있던 중국의 중국인들을 제외하면 외국인 36명이 우리나라를 도왔다. 그중에서 박사님은 한평생인 50년을 한국 독립에 매진한 유일한 분이다. 우리는 박사님을 비롯한 이들에게 어떻게든 고마움을 전하고 이들의 정신을 기려야 한다. 그랬을 때만이 은혜를 아는 진정한 선진문화 민족이 될 수 있다고 여긴다.”

2009년 헐버트 박사 60주기 추모식에서 내한한 헐버트 박사의 손자 부르스 헐버트씨 내외가 (사)헐버트기념사업회 김동진 회장에게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교과서 ‘사민필지’ 원본을 기증하고 있다. 김동진 회장 제공

-구상 중인 추모사업이나 향후 계획을 소개한다면.

“우선 우리나라 최초의 교과서이자 그것도 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 영인본을 제작해 국민에게 이 책의 역사적 의미를 알리고 싶다. 헐버트 기념관도 건립해야 한다. 그를 세계에 알리는 일은 곧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일이다. 왜냐하면 박사님의 삶의 대상이 모두 한국이기 때문이다. 헐버트 박사는 한민족 전체를 위해 헌신했고 남북 분단의 한을 안고 서거했다. 따라서 가능하다면 남북을 어우르고 국제평화를 상징하는 비무장지대(DMZ) 같은 곳에 세웠으면 좋겠다. 아울러 헐버트 박사가 살고 당시 활동한 덕수궁 정동길을 ‘헐버트 독립 운동길’로 조성하는 안을 당국에 건의할 생각이다. 정동길에 헐버트 박사가 몸담았던 우리나라 최초의 관립학교 육영공원이 있었고, 고종황제로부터 밀사명을 받으며 고종의 밀서를 받은 곳이 바로 정동의 중명전이기 때문에 고종과 헐버트를 함께 기억하는 공간이 될 것이다.”

 

-정부에 당부하고 싶은 말은.

“대한민국이 과연 우리를 도운 외국인들을 제대로 대접하고 있는지를 새겨 볼 필요가 있다. 올해 임시정부 수립 및 3·1운동 100주년인데 우리를 위해 헌신한 외국인 독립운동가에 관련된 행사는 단 한 건도 없었다. 언론도 조명을 안 하고 정부도 행사를 안 했다. 안타깝다. 이제라도 정부가 외국인 독립유공자를 제대로 예우하고 기리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나서서 우리가 서훈한 외국인 독립유공자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면 국민들도 지금까지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고, 그 나라 국민들도 감동할 것이다. 이들에 대한 감사는 이들이 속한 나라와의 우의증진에도 도움이 되는 민간외교가 될 수 있다. 우리의 국격을 높이는 일이기도 하다.”

 

박태해 선임기자 pth1228@segye.com

 

김동진 회장은… △1950 전북 진안 출생 △1980 건국대 법학과 졸업 △1986 연세대 경영대학원 졸업(경영 석사) △1988 미국 케미칼은행 뉴욕 본점 한국·대만 담당 매니저 △1996 후순위채(Sub. Debt) 국내에 최초로 소개 △1998 IMF 외환위기 외채연장 협상에서 국제채권단 대표 △1999 미국 체이스맨해턴은행 한국 대표 △1999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발기인 및 부회장 △2001 미국 제이피모건은행 한국 회장 △2002 PCA투신운용 대표이사 △2003 국무총리 표창(외자유치 공로) △2004∼현재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회장 △2006 헐버트의 저서이자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 영인본 공개 △2010 ‘파란눈의 한국혼 헐버트’ 출간 △2011 뉴욕 코리아소사이어티(The Korea Society)에서 헐버트 박사에 관한 특별강연 △2013 정부에 청원, 헐버트 박사 외국인 최초로 ‘이달의 독립운동가’(7월) 선정 △ 2014 정부에 청원, 헐버트 박사 ‘금관문화훈장’ 추서, 미국 미시건주립대가 주는 ‘글로벌코리아상’ 수상 △2016 ‘헐버트 조선의 혼을 깨우다’(헐버트 논문 번역서) 출간 △2018 독립기념관 비상임 이사 △2019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 (헐버트 일대기)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