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워라밸에 대한 인식은 한걸음 전진했지만 ‘일과 육아’라는 현실의 벽은 아직도 매우 높다.
‘2030세대’ 여성에게 출산은 축복이 아니라 경력단절을 각오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선택이다. 남성에게 육아 휴직은 조직 내에서 ‘에이스’의 길을 포기해야 하는 모험이다. 아니다. 육아와 출산 휴가를 사용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일인지 모른다. 대부분 기업이 출산휴가와 육아휴직 등 일·가정 양립제도를 알고는 있지만 활용도는 미미하다.
◆육아휴직 신청할 수 있는 것도 감지덕지
◆남자 육아휴직을 ‘루저’로 보는 시선
“저는 남자 육아휴직을 했던 남편(국가직 공무원)을 둔 대한민국 여성입니다. (중략)남자 육아휴직으로 인한 사회의 인식은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으며, 직장 내에서도 육아휴직을 했던 제 남편은 승진에 대해 마음을 비우자고 합니다. 지금까지 남자가 육아휴직을 해서 승진한 사례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
영화 <82년생 김지영> 속 주인공 지영의 남편 대현(공유 분) 이야기가 아니다. 육아휴직이 비교적 쉬운 공무원 사회에서도 남자 육아휴직은 별난 취급을 받는다. 세종 관가에서도 잘나가는 남자 공무원 중에 육아휴직을 신청하는 경우는 드물다.
지난달 취업포털 인크루트와 바로면접 알바앱 알바콜이 육아휴직을 주제로 회원 114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육아휴직을 사용해 본 남성 직장인은 5명 중 1명에 그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응답한 직장인 중 육아휴직을 사용해 본 비율은 32.4%로 집계됐다. 나머지 67.6%는 육아휴직을 사용하지 못했다. 성별에 따른 차이도 컸다. 여성 직장인의 37.5%가 육아휴직을 사용해봤다고 응답한 반면, 남성 직장인은 그 사용비율이 20.8%로 여성의 절반 가까이 적었다.
육아휴직을 가로막은 이유는 다양했다. 그중에서도 ‘상사 눈치’(22.7%)와 ‘회사 분위기’(22.0%)가 가장 큰 걸림돌로 전체 이유의 절반을 차지했다. 특히 남성의 경우 ‘회사 사람 대부분 육아휴직을 안 쓰는 분위기’(27.2%)를, 여성 직장인은 ‘상사와 동료 눈치’(22.6%) 때문에 각각 사용에 큰 제약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러다 보니 육아에 전념하는 아빠는 루저라는 그릇된 인식마저 우리 뇌리에 똬리를 틀고 있다.
독일의 시장조사기관 스태티스타(Statista)에 따르면 한국인의 76%가 ‘육아에 전념하는 아빠는 루저’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글로벌 여론조사기관 입소스(Ipsos)는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 한국 등 세계 27개국의 성인 1만8800명을 대상으로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남성은 남자답지 못한가’를 주제로 설문을 진행했고, 스태티스타가 이 결과를 인용했다. 이는 2위인 인도(39%), 3위인 브라질(26%)과도 큰 차이였다. 영국·독일·스페인·호주(이상 13%)와 미국(14%), 독일(18%) 등 서구 선진국은 물론 일본(15%)까지 이에 대해 찬성하는 경우는 10%대에 불과했다.
◆현실 속 수많은 ‘82년생 김지영’
국내 굴지의 광고회사에서 일하던 A(38·여)씨는 사내 핵심 부서인 제작팀에서 일하다 6개월 전 인사팀 책임으로 자진해서(?) 옮겨야 했다. 맞벌이라 세 살과 여덟 살 자매를 친정에 맡긴 채 야근을 밥먹듯하며 강행군을 했으나 이젠 더 버틸 수 없었다. 큰아이가 초등학교 적응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결국 사표를 각오하고 미뤄둔 1년짜리 육아휴직에 들어갔다. 다행히 복직할 즈음에 사내 비제작부서인 인사팀에 자리가 생겨 운 좋게 복직했다. A씨가 10여년간 지켜온 제작 부서의 책상은 그렇게 사라졌다.
결혼과 출산으로 경력이 단절된 여성을 비춘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2030세대 경력단절여성(경단녀)’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다. 26일 발표된 통계청 자료를 보면 기혼 여성 5명 중 1명은 결혼과 출산, 육아 등으로 직장을 포기한 경단녀였다. 특히 30대 여성의 경력 단절이 심각했다.
◆여성 취업 권하는 사회 … ‘육아’가 최대 걸림돌
대기업 계열사에 다니는 김미선(가명·38·여)씨는 맞벌이로 아들 둘(9세·6세)을 키우면서도 경력단절의 고비를 넘긴 운 좋은 경우다. 김씨는 지난 9년의 세월, 육아 문제에서 돌보미 구하는 문제가 가장 어려웠다고 하소연한다. 김씨는 친정이나 시댁 도움 없이 오로지 아이돌보미와 어린이집에 의존하며 버텨온 세월이 신기하기만 하다. 아이돌보미가 갑자기 그만둬 동네 곳곳에 전단지를 붙이던 시절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하다. 어렵게 구한 아이돌보미마저 사내 아이 둘은 버겁다며 1주일 만에 그만둬 1주일 휴가를 내고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정부의 아이돌봄 서비스도 맞벌이 부부인 김씨에게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김씨처럼 ‘여성 취업’의 성패는 육아 문제에 달렸다. 통계청의 ‘2019년 사회조사 결과’를 보면 여성 취업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2019년 기준 86.4%에 달했다. 긍정 응답을 한 사람 중 절반 이상이 ‘가정일에 관계없이’ 여성이 직업을 계속 가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들은 여성 취업의 가장 큰 장애 요인으로 △육아부담(50.6%)을 꼽았고 △사회적 편견(17.7%) △불평등한 근로여건(12.7%) △가사부담(5.8%) 등을 택했다. 연령별로 보면 모든 연령대에서 ‘육아부담’이 가장 큰 장애요인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30대가 63.1%를 육아부담이라고 응답해 가장 높았고, 40대가 56.4%로 뒤를 이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김광수 민주평화당 국회의원이 여론조사전문기관 타임리서치에 의뢰해 지난달 2~3일 조사한 결과 ‘출산을 꺼리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도 전체 응답자의 절반에 가까운 44.3%가 ‘육아에 대한 경제적 부담’을 꼽았다. 이어 ‘사교육 등 교육문제’ 15.5%, ‘출산 여성의 경력 단절 문제’ 13.8%, ‘주택 마련 부담’ 12.3%, ‘청년 취업난에 대한 우려’ 11.0% 순으로 나타났다.
이런 상황은 결과적으로 35∼44세 여성의 고용률 저하로 나타난다.
한국 여성 고용지표가 전체적으로는 개선세이지만 35~44세 여성의 고용률은 여전히 30-50클럽 7개국 중 최하위 수준이다. 30-50클럽이란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 이상, 인구 5000만명 이상의 조건을 만족하는 국가다. 대표적으로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한국 등이 속해 있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35∼39세, 40∼44세 여성 고용률은 각각 59.2%, 62.2%로 7개국 중 가장 낮았다. 1위인 독일과는 약 20%포인트 차이를 보였다. 특히 여성 전체 고용률이 최하위인 이탈리아도 35∼44세 여성 고용률은 한국보다 높았다.
세종=이천종 기자, 윤지로 기자 skyle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