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성큼 다가왔다. 모임, 회식이 잦아 요식업시장에서는 가장 많은 매출을 올리는 시기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지금 우리가 즐기는 술 문화의 틀이 대부분 1980년대에 잡혔다는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레트로, 뉴트로 문화가 바로 1980년대 문화다. 지금도 건재한 1980년대 술자리와 사라진 문화를 정리해보자.
1980년대에는 호프집이 등장한 때다. 1970년대 통기타와 생맥주를 마시는 문화는 있었지만 호프집이라고 불리진 않았다. 이렇게 호프집이라는 단어를 쓰게 된 이유는 1986년 대학로에 OB호프가 생기고 난 이후다.
당시 OB맥주 관계자가 독일을 방문한 후, 광장에서 맥주를 마시는 모습에 인상을 받아 만든 것이 OB호프다. 당시 두산타워 지하에 있었으며 2000년대까지 인기를 끌었다. 안주 역시 독일 것을 따와 소시지 볶음 등이 최고 인기 메뉴였다. 어릴 적 호프집의 호프는 희망을 상징하는 ‘호프(Hope)’ 또는 맥주에 들어가는 ‘홉(Hob)’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호프(Hof)는 독일어로 정원 또는 광장이었다는 사실. 야외에서 즐기는 맥주라는 의미다.
폭탄주의 등장도 1980년대다. 국산 위스키들이 대거 등장했기 때문이다. 진로 VIP, 백화양조의 디플로매트, 썸씽스페셜, 패스포트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면서 법조계에서 기록상 최초로 ‘양맥’을 즐겼다. 위스키와 맥주를 섞어 마신 것이다. 2000년대 이후, 이렇게 섞어마시는 문화는 오십세주와 소맥으로 발전(?)하게 된다. 또 당시 위스키가 너무 고가라서 유사양주 등이 많이 팔렸다. 대표적인 것이 캡틴큐와 패스포트였다.
1980년 중후반에는 칵테일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주로 여대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싱가포르 슬링, 피나 콜라다 등의 칵테일이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나왔다. 주로 마신 곳은 경양식 레스토랑. 돈가스가 코스요리로 나오던 때이다. 나비넥타이를 한 웨이터가 “빵으로 하시겠습니까?” “밥으로 하시겠습니까?”란 질문을 하면 우아하게 빵으로 먹겠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경양식 레스토랑의 이름은 ‘장밋빛 인생’, ‘로마의 휴일’, ‘겨울 나그네’ 등 감성적인 이름이 많았다. 이들은 1990년대와 2000년대 패밀리 레스토랑이 생기면서 사라지게 된다.
1970년대부터 슬슬 등장하던 국산 와인도 1980년대 본격적으로 보급된다. 대표적인 것이 OB에서 만들던 마주앙이다. 마주 앉아 마신다는 이 와인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독일을 순방한 후, 한국의 척박한 땅에 와인용 포도(리슬링 등)를 심어 와인을 만들자는 데에서 출발했다. 당시 크리스마스 때 이 와인을 마시는 가정도 있었는데, 나름 부의 상징이기도 했다. 하지만 마주앙 와인은 1990년대 수입자유화의 물결로 서서히 사라지며 지금은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이다.
1980년대는 독재정권을 물리치고, 민중의 투쟁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이뤄냈던 시기다. 암울했던 역사를 이겨냈던 시기다. 그리고 술은 그러한 민중의 속을 달래주었다. 알고 보면 술의 역사는 민중의 역사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명욱 주류문화 칼럼니스트
● 명욱 주류문화 칼럼니스트는…
숙명여대 미식문화최고위 과정, 세종사이버대학교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객원교수. SBS팟캐스트 ‘말술남녀’, KBS 1라디오 ‘김성완의 시사夜’의 ‘불금의 교양학’에 출연 중. 저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 ‘말술남녀’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