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행·협박 없으면 처벌 못하는 강간죄… 국회 법 개정 ‘뒷짐’ [뉴스 인사이드]

성폭력 피해자 70% “직접 폭행 없었다”/ ‘미투’ 계기 현실과 괴리 현행법 비판 봇물/ 강간죄 구성 요건에 ‘상대 동의 여부’ 반영/ 3월 법사 소위에 개정안 8건 무더기 상정/ 한해 다가는데 국회 논의 한차례도 없어/ 답답한 여성·인권단체 208곳 직접 팔 걷어/ “입법 논의 기준될 案 만드는 중” 합의 모색

“비동의 간음죄(동의 없는 성관계에 대한 처벌 조항) 등 최근 논의되고 있는 여러 법안이 있습니다. 이걸 이 자리에서 복잡하게 다 논의할 순 없습니다. 지금 성폭력범죄에 관한 구성요건을 어떤 형식으로 정리할 수 있는지 한 번 연구를 해가지고 다음번 우리 4월1일자 소위 때 상정하도록 하겠습니다.”(송기헌 소위원장)

“이것(관련 개정안)은 그러면 심사를 안 하나요?”(김도읍 위원)



“다음에 하자고요.”(송 소위원장)

“상정은 해 놓고 하는 게 어때요? 이것 또 상정 안 하면 좀 그럴 텐데.”(금태섭 위원)

“아니, 우리가 협의해서 이걸 다음번에 상정하면 되니까.”(송 소위원장)

“일단 상정하고 다음에 논의하는 것으로 하시지요.”(채이배 위원)

“상정을 해도 어차피….”(송 소위원장)

“이것 상정 안 한다고 계속 말이 많은데….”(금 위원)

“그러면 회기가 끝나기 때문에 어차피 다시 상정을 해야 되는 거예요, 다음에 안건으로.”(송 소위원장)

“다시 상정해도 되지요. 그런데 오늘은 상정하자고요.”(금 위원)

“알겠습니다.”(송 소위원장)

지난 3월25일 열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제1소위원회 회의록 내용 중 성폭력 범죄 구성요건에 ‘상대의 동의 여부’를 반영하는 취지의 형법 개정안 8건을 상정하면서 의원들끼리 주고받은 발언이다. 법무부, 법원행정처 의견 제출이 필요하다며 제대로 된 논의는 이뤄지지 않았고 그저 이들 언급대로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면피성 상정’만 진행됐다. 더욱이 위원들은 4월1일 예정된 2차 회의에서 해당 건을 재논의하기로 했으나 실제 회의에선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이후 한 해가 다 가도록 관련 국회 논의는 진전이 없는 상황이다.

지난해 ‘미투(Me Too)’ 운동을 계기로 오랜 기간 드러나지 못한 성폭력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 과정에서 ‘폭행 또는 협박’을 구성 요건으로 하는 현행법상 강간죄 조항이 실제 우리 사회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는 성폭력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이런 여론에 발맞춰 국회가 지난해 말부터 여야 가릴 것 없이 동의 여부를 강간죄 요건 중 하나로 삼는 개정안을 쏟아냈다. 그러나 20대 마지막 정기국회가 얼마 남지 않은 현 시점까지 제대로 된 논의가 단 한 차례도 이뤄지지 못하면서 이들 개정안은 아무 성과 없이 표류하고 있는 것이다.

◆국회 대신 합의 나선 여성·인권단체

보다 못한 여성·인권단체 측이 국회 논의를 진전시키기 위해 한 의원실과 함께 기존 발의된 개정안을 통합하는 작업을 최근 진행 중이지만 그 통합안이 발의되더라도 최종 의결 가능성은 여전히 미지수이다. 전국 여성·인권단체 208곳이 모인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 관계자는 29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국회에서 발의된 안의 합의에 나설 만한 의원이 없는 분위기라서, 조만간 발의를 목표로 저희가 관련 입법 논의에 기준이 될 수 있는 안을 만들고 있다”고 밝혔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현재 20대 국회에서 발의된 관련 개정안은 총 10건이다. 이 중 기존 강간죄의 폭행·협박 요건을 아예 비동의 요건으로 대체하는 안이 5건, 기존 조항 외 상대방 의사에 반해 강간한 자를 처벌하는 조항을 신설하는 안이 3건, 기존 조항에 폭행·협박 요건과 함께 비동의 요건을 추가하는 안이 2건이다.

현행법은 강간죄에 대해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는 3년 이상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정하고 있다. 우리 대법원은 이 조항에 기반해 ‘피해자의 반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 또는 협박’이 있어야 강간죄를 인정하는 ‘최협의설’을 기본적으로 따르고 있다.

 

이런 제한적 해석 바깥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성폭력이 발생하고 있는 게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실제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전달한 의견서에 따르면 지난 1∼3월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를 통해 성폭력상담소 66곳에 접수된 강간(유사강간 포함) 상담 사례를 분석한 결과 피해 사례 총 1030명 중 71.4%(735명)가 직접 폭행·협박 없이 발생한 피해사례였다.

◆‘동의 여부’ 입증이 어렵다?

강간죄 개정 움직임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일각에선 비동의 요건을 강간죄 조항에 명시할 경우 수사나 재판에서 ‘피해자 동의 여부’를 입증하기 곤란해 혼선을 빚거나 피의자 방어권이 보장되지 못할 것이란 목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의견은 실제 성폭력 범죄 수사·재판을 깊이 들여다보지 않은 단견이라는 게 수사기관 관계자의 의견이다. 서울남부지검 박은정 부부장검사는 최근 관련 국회 토론회에서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의 일방 진술만으로 기소되는 경우는 많지 않으며 수사과정에서 그 진술을 보강하는 수많은 증거를 갖춘다”며 “피해자의 비동의 입증이나 (기존 요건인) 폭행 입증이나 차이가 없다. 모두 피해자 진술을 근거로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가해자가 동의 여부를 입증하는 게 아니라 검사가 동의가 없었음을 입증하는 것이고, 그 모든 책임이 검사에게 있다”고 말했다.

실제 여성가족부가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 연구용역을 의뢰해 펴낸 ‘젠더 폭력 관련 법체계 개선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경찰, 검사 등 수사기관 관계자를 포함해 교수, 판사, 변호사, 비정부기구(NGO) 활동가 등 전문가 48명에게 강간죄 개정 의견을 물은 결과 ‘폭행·협박 요건 제거 후 비동의 요건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의견이 절반 넘는 54.2% 응답률을 기록했다. 다른 20.8%에 해당하는 응답자도 대법원이 강간죄 조항 해석에 채택하고 있는 최협의설 대체가 필요하단 의견을 내놨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성폭력에 대한 우리 사회 인식이 이미 크게 변했다. 우리 모두 본인이 원하지 않는 누군가의 성적 행동으로 피해를 봐선 안 된다”며 “동의 여부를 반영하는 강간죄는 전 세계적 흐름이자 시대적 과제이기에 이번 국회에서 그 과제를 꼭 완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UN·EU “동의 여부가 성폭력 판단 기준”

 

‘타인의 인식가능한 의사에 반해 성적 행위를 그에게 실행하거나, 그로 하려금 실행하도록 하거나, 그로 하여금 제3자에 대해 성적행위를 실행하거나, 제3자의 성적행위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자는 6개월 이상 5년 이하 자유형에 처한다.’

 

이는 2016년 11월 시행된 독일 형법 중 성적침해·성적강요·강간에 대해 정한 제177조 1항 내용이다. 여기서 ‘타인의 인식가능한 의사’에는 명시적 의사 표시뿐 아니라 묵시적 표현까지 포함된다. 상대방의 의사가 성폭력 범죄의 기본 요건이기에 기존 구성 요건인 ‘폭력’, ‘위협’, ‘피해자가 범죄자 행위에 무방비하게 맡겨진 상황’은 가중 처벌을 위한 요건이 됐다.

 

독일처럼 강간죄 요건에 동의 여부를 반영하는 법 개정 움직임은 전 세계적으로 계속 확대하는 중이다. 2010년대 들어 국제기구 중심으로 권고나 협약 형태로 강간 개념 변화가 필요하단 목소리가 커졌고, 각 국가들이 동의 여부를 강간죄의 기본 요건에 보는 법 개정에 동참하는 모습이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유엔(UN) 여성지위향상국(DAW)은 2010년 여성 폭력 입법권고안을 담은 핸드북을 통해 ‘명백하고 자발적인 동의’를 강간 판단 기준으로 삼거나 ‘강압적 상황’이 존재하는 경우 강간이라고 보되 그 해석을 넓게 하는 식의 입법이 이뤄져야 한다고 권고했다. 유럽연합(EU)도 2011년 ‘여성·가정폭력 방지와 대응을 위한 유럽평의회협약’을 통해 동의 없는 성적 행위를 강간 등 성폭력으로 규정했다. 현재 유럽 46개 회원국이 서명하고 34개국이 비준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스웨덴은 지난해 형법을 개정해 강간죄 기본 구성 요건으로 ‘자발적으로 성행위에 참여하지 않은 경우’를 명시했다. 이 경우에 해당하는 요건으로는 △폭행 또는 협박 △피해자의 취약한 상태 이용 △피해자가 의존하는 지위의 심각한 남용을 제시하고 있다. 스웨덴은 가해자가 상대방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경우를 활용한 ‘고의’가 입증되지 않더라도 ‘심각한 부주의’가 입증되면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도 마련하고 있다.

 

김승환 기자 hwa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