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선율, 그 추억…그리움은 돌고돈다/‘목포의 눈물’ 난영공원/식민시절, 노래로 한 달래주던 가수 이난영의 흔적 고스란히/성남 ‘신해철 거리’/작업실 주변 조성…추모 글 가득/우린 ‘마왕’을 떠나보내지 않았다/‘광화문 연가’ 덕수궁 돌담길/작곡가 이영훈 노래 ‘흥얼흥얼’/연인들의 영원한 데이트 코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씨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아주 오래전. 호남선 기차가 목포역에 가까워지면 누군가 노래를 읊조리기 시작한다.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 다들 따라서 노래를 흥얼거렸다. ‘목포의 눈물’. 목포 사람들의 애환이 구구절절 담겼으니 이 노래는 목포의 ‘주제곡’이다. 골목길 허름한 주점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취객들의 18번’을 부른 가수는 이난영. 한국 최초의 대중가수이자 최초의 걸그룹 멤버다.
한 곡의 대중가요는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하고,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일으켜 세운다.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려 힘든 현실을 버티게 하는 힘도 되어준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가수.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노래와 함께 떠나는 여행지로 그들의 흔적을 따라가 본다.
#목포의 눈물, 그리고 최초의 걸그룹 이난영
‘목포의 눈물’이 발표된 것은 일제강점기이던 1935년. 문일석의 작품에 손목인이 곡을 붙인 이 곡이 발매와 동시에 대중의 큰 호응을 얻자 종로경찰서는 2절 가사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를 문제 삼았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은 목포 유달산의 노적봉을 짚과 섶으로 덮어 군량미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대군이 있는 것처럼 위장해 왜장을 후퇴하게 만들었다. 일제는 노래를 이 이야기와 결부시켜 ‘항일’로 몰고 갔다. 이에 음반을 발매한 OK레코드 이철 사장이 ‘삼백연(三栢淵) 원안풍(願安風)’이라는 뜻 모를 가사로 바꿔 일제 경찰의 검열을 피해갔다고 한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식민지 시절 목포 사람들의 애환을 절절하게 담은 앨범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이난영은 ‘해조곡’(海鳥曲), ‘울어라 문풍지’, ‘흘겨본 과거몽(過去夢), ‘목포는 항구다’, ‘다방의 푸른 꿈’을 잇따라 발표하며 당대 최고의 스타 가수로 활동했다.
한국전쟁 때 가요 작곡가이던 남편 김해송이 납북된 뒤에도 이난영은 남편과 함께 결성했던 KPK 악극단을 직접 이끌었다. 사실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난영은 한국 최초의 걸그룹 출신이다. 요즘 젊은 층에도 많이 알려진 ‘오빠는 풍각쟁이’를 부른 박향림, ‘연락선은 떠난다’의 정세정, ‘화류춘몽’의 이화자 등과 함께 1936년 ‘저고리 시스터즈’를 결성해 활동하기도 했다.
이난영의 흔적을 따라가는 여행은 목포역에서 시작한다. 서울에서 목포는 생각보다 그리 멀지 않다. KTX 덕분에 용산역에서 출발한 기차는 2시간 반이면 목포역에 닿았다. 가장 먼저 찾아야 할 곳은 노랫말 속에 등장한 삼학도 중 대삼학도. 이곳에 조성된 난영공원에서 ‘목포의 눈물’과 ‘목포는 항구다’의 노래비를 만나는데 이난영은 이곳 배롱나무 아래에 잠들어 있다. 원래 파주 용미리에 있던 묘지를 목포의 눈물 기념사업회가 2006년 이전했다고 하니 목포 사람들의 이난영 사랑이 대단하다. 공원은 1000평 규모로 넓고 쾌적하게 조성돼 새로운 힐링 공간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공원을 산책하다 보면 은은하게 목포의 눈물이 울려 퍼진다.
노적봉 입구에서 유달산으로 오르는 계단을 따라가다 이순신 장군 동상을 지나면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나온다. 목포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진 풍경을 감상하며 시대에 따라 조금씩 바뀐 가사를 비교할 수 있다. 여유가 있다면 이난영 생가 터도 가보자. 그가 다닌 목포공립보통학교(현 목포북교초) 맞은편에 생가 터가 있는데 집은 철거됐지만 그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마왕’의 숨결 살아 있는 신해철 거리
2014년 10월 황당한 사고 소식이 전해진다. 음악계를 호령한 ‘마왕’ 신해철이 장협착 수술을 받은 지 5일 만에 복막염과 패혈증으로 갑자기 사망했는데 의료사고로 밝혀져 팬들은 통곡하고 분노했다. 그가 떠난 지 어느덧 5년이 흘렀지만 신해철은 성남에 여전히 살고 있다. 경기 성남시 분당구 발이봉로3번길 그의 작업실 주변에 ‘신해철 거리’가 조성됐기 때문이다. 마이크를 잡은 신해철 동상을 중심으로 160m가량 길이 이어지는데 바닥에는 가수 인순이, 방송인 유재석 등 생전의 그를 추모하는 많은 이들의 글이 적혀 있다.
특히 “세월이 흘러가고 우리 앞에 생이 끝나갈 때 누군가 그대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어보면 대답할 수 있나 지나간 세월에 후회 없노라고”(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나 언젠가 심장이 터질 때까지 흐느껴 울고 웃으며 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 없이(민물장어의 꿈)” 등 그의 노랫말이 새겨진 나무 푯말이 보는 이들을 울컥하게 만든다.
스튜디오는 신해철의 흔적들로 가득해 당장 그가 어디선가 걸어 나올 듯하다. 책장에는 빌 게이츠 ‘생각의 속도’와 도올 김용옥의 ‘금강경 강해’, ‘해리포터 시리즈’ 등이 빼곡하게 꽂혀 있다. 평소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다독한 신해철의 인생을 엿볼 수 있다. 서재 옆 음악 감상실에서는 넥스트 콘서트 때 입고 열창하던 의상이 그대로 걸려 있고 1997년 넥스트의 라이브 앨범을 즐길 수 있다.
#덕수궁 돌담길과 광화문 연가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광화문 연가’, ‘옛사랑’. 이문세의 대표적인 주옥같은 노래들이다. 2008년 가요계는 그의 많은 노래들을 만든 천재적인 작곡가 이영훈을 떠나보냈다. 하지만 광화문 연가는 뮤지컬로, 인기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배경음악으로 여전히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있다. 더구나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이라는 노랫말처럼, 정동제일교회는 아직 그대로 같은 자리에 서 있어 이영훈을 기억하는 여행자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예배당이 운치를 더하는데 이 교회는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19세기 교회 건물로 1918년 국내 최초로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됐다.
교회 맞은편에서 이영훈의 노래비를 만난다. 마이크 모양인데 그를 추모하는 글들과 함께 ‘소녀’, ‘붉은 노을’ 등 그의 주옥같은 노래가 새겨져 있다. 덕수궁 돌담은 ‘연인들이 걸으면 반드시 헤어진다’는 속설이 전해진다. 하지만 사계절 아름다운 길이라 많은 연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 길을 걷는다. 얼마 전 영국대사관에 막혀 있던 덕수궁 돌담 내부길이 열리면서 호젓한 데이트 코스로 더욱 인기를 끌고 있다.
최현태 기자 htchoi@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