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세계적인 경제 전문지인 포브스가 세계에서 가장 혁신을 주도하는 리더 100명의 리스트를 발표했다. 이런 리스트는 항상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그것을 선정하는 주체 선발의 공정성, 객관성에 신뢰가 가든 가지 않든 사람들은 누가 리스트에 포함되었는지 알고 싶어서 일단 클릭을 한다. 사실 그런 호기심을 잘 알기 때문에 매체들은 ‘세상에서 가장 섹시한 인물’ 따위의 리스트를 꾸준히 만들어 발표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잘 팔리는 기사다.
그런데 이번에 포브스가 발표한 기사는 큰 역효과가 나버렸다. 포브스가 발표한 100명 중에 여성은 단 한 명밖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21세기에 혁신적인 인재의 99%가 남자라는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에 사람들은 “남성중심적 사고를 가지고 기준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 크게 반발했다. 근래 들어 달 착륙부터 인터넷 발명까지 ‘남성들의 작품’처럼 여겨진 인류의 많은 업적들에 여성들이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그것이 책과 영화로 등장하는 일이 흔한데, 포브스의 선정은 그런 세계적인 추세에 완전히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포브스는 비판을 받자마자 “우리가 일을 그르쳤다(We blew it)”고 시인하는 발표를 했고, 앞으로 기준을 좀 더 정확하게 세우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왜 주요 업적에 참여한 여성들의 이름은 빠지고, 잊혀지는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가 남성중심사회의 오래된 선입견이다. 가령, 같은 일을 하는 과학자와 엔지니어들도 여성이면 ‘저 사람은 중요하지 않은 단순 업무를 하는 사람이겠지’하고 단정 짓는 버릇이다. ‘여성은 남성들이 하는 업무를 보조한다’는 오래된 선입견은 남성 직원과 똑같은 일을 하는 여성 직원이 앉아 있으면 “커피 하나 갖다 달라”고 말을 쉽게 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냈고, 사람들은 여성 과학자, 엔지니어, 최고경영자(CEO)가 하는 일은 남성보다 상대적으로 단순하고 단면적일 것으로 무의식적으로 깎아내리는 것이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게릴라걸스(Guerilla Girls)’라는 단체다. 그들은 대규모 정규군에 맞선, 작고 힘없는 저항군이 택하는 전술인 ‘게릴라’ 전술을 이용해서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끌어서 현대미술관의 권력에 저항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우리말에서는 고릴라와 게릴라가 완전히 다른 발음으로 들리지만, 영어에서는 둘 다 ‘거릴라’에 가깝게 발음하기 때문에 게릴라걸스는 고릴라걸스로 들리기도 하는 걸 이용해서 고릴라 가면을 사용한 것이다).
이렇게 정체를 감추고 미술계의 남성중심 권력구조를 비판하기 시작한 게릴라걸스는 미국 뉴욕을 시작으로 지난 30년 넘게 전세계 미술관과 갤러리들의 작가 선정과정에 개입된 남성중심적인 시각을 폭로해왔다. 대표적인 것이 19세기 프랑스 신고전주의의 거장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누드화 ‘그랑 오달리스크’(1814)를 차용한 포스터다. 모델의 얼굴에 게릴라걸스가 사용하던 고릴라 가면을 씌운 이 포스터는 뉴욕의 또 다른 대표적인 미술관인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편견을 이렇게 지적한다. ‘(이 미술관의) 현대미술 섹션에 소개된 아티스트 중 여성은 5%밖에 되지 않는데, 그 섹션에 소개된 누드화 속 인물은 85%가 여성이다. (결국) 여성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들어가려면 옷을 벗어야 하는 것인가?’
이 지적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남성 중심 시각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해 길게 설명하지 않고 5%와 85%라는 충격적인 숫자로 문제의 핵심을 직관적으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문제의 핵심은 “여성은 바라보는 대상이지, 창작의 주체가 아니다”라는 인류 역사 속에 깊숙이 자리잡은 차별적인 편견이다.
게릴라걸스는 ‘여성 아티스트가 가진 장점’이라는 리스트를 발표하기도 했다. 여성 아티스트가 겪는 어려움을 비꼬아 제시한 이 13개 항목의 ‘장점’들에는 “성공에 대한 부담이 없다”(거의 불가능하니까), “80세가 넘으면 유명해진다”(여성은 평생을 바쳐야 죽기 전에 간신히 유명해진다), “뭘 만들어도 여성성을 표현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자신의 아이디어는 다른 사람(남성)들이 가져다 사용해준다,” “천재라는 부담스러운 찬사를 들을 필요가 없다”처럼 재치있고 뼈아픈 지적들이 가득하다.
21세기에 들어온 지도 20년이 다 된 시점에 포브스가 발표한 남성중심의 편견이 가득한 리스트를 보면서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좌절감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포브스의 문제를 지적한 사람들은 더 이상 고릴라가면을 쓰지 않았고, 포브스라는 전통 매체가 하루이틀 만에 사과했을 만큼은 변했다. 사회는 그렇게 아주 조금씩 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