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 갖추면 낙선도 정치적 자산… 등 떠밀린 쇼맨십 ‘필패’

험지출마론의 정치학 / 적진서 대권 발판으로 / 노무현 연거푸 낙선해도 부산 고집 / ‘지역주의 타파’ 상징적 정치인 부상/ 김부겸 보수텃밭·이정현 전남 순천서 / 둘다 지역구서 진정성 인정받아 당선 / 정략적 출마는 당 분열만 / 오세훈 전 시장·안대희 전 대법관 / 당 공개 요구에 뒤늦게 지역구 옮겨 / 정치적 보상 큰 만큼 위험부담도 커 / 일방 강요·차출… 감동도 효과도 없어

“스스로 죽고자 하면 살고, 떠밀려 나가면 죽는다.”

21대 총선이 4개월 앞으로 다가오면서 최근 정치권에서 여야를 막론한 ‘험지 출마론’ 바람이 다시 거세게 불고 있다. 그러나 험지출마는 불확실한 선거판에서도 적진에 뛰어드는 일인 만큼 ‘생존 가능성’이 낮아 후보자로서는 쉽게 손길이 가지 않는 선택지일 수밖에 없다. 다만 살아남을 경우에는 그만큼 큰 정치적 보상이 뒤따른다.



최근 자유한국당 안팎에서 인적 쇄신, 이른바 ‘물갈이’ 요구가 커지면서 보수의 텃밭으로 꼽는 영남과 서울 강남 지역의 중진 의원들과 지도급 인사들이 ‘험지’에 출마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분출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성 없는 일방적인 ‘등 떠밀기’는 쇼맨십에 불과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스스로 적진에 나서 대권 발판으로… 성공한 험지 출마

과거 총선에서 험지에 도전장을 내밀어 성공한 사례의 특징은 ‘스스로의 결단’이라는 공통점이다. 위험한 선택인 만큼 성공했을 때 정치적 위상을 단번에 높일 수 있다. 설령 실패했더라도 정치적 자산을 얻어 더 큰 행보로 가는 발판이 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2000년 16대 총선 부산 출마가 대표적 성공 사례다.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13대 총선에서 부산에 출마해 당선됐지만, 14대 총선과 1995년 부산시장 선거에서 연거푸 낙선했다. 이후 1998년 서울 종로 보궐선거로 국회 재입성했지만, 2000년 16대 총선에서 종로가 아닌 부산에 재도전하는 결단을 내렸다. 그는 “지역구도 때문에 영남 대통령이 호남에 가면 구의원도 안 되고, 호남의 대통령은 부산에 오면 구의원도 되지 않는 이런 정치가 되고 있다. 그래서 나라가 흔들리고 있다”며 지역주의 타파를 선언했지만 끝내 낙선했다. 이 일로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러나 이 낙선은 이후 그의 대권 가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역주의 극복’의 상징적 인물이 된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의원도 험지 출마를 통해 대선주자 반열에 들어선 사례로 꼽힌다. 경기 군포에서 내리 3선을 지낸 그는 2012년 돌연 ‘보수의 텃밭’이자 자신의 고향인 대구 수성갑 출마를 선언하고 고배를 마셨지만 이후 20대 총선에서 당선하며 대권 주자 중 한 명으로 급부상했다.

박근혜 전 정권 실세였던 무소속 이정현 의원은 2014년 재보선에서 전남 순천에 도전해 당선됐다. 이후 최초의 호남 출신 새누리당 대표라는 기록도 세웠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험지 출마 성공사례의 공통 요인으로는 ‘인물’과 ‘진정성’을 꼽았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험지 출마에는 후보자의 인지도와 해당 지역(험지)으로 오는 데 있어 합당한 명분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했다. 이어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산 출신임에도 서울 종로에 도전한 건 자신의 목표·명분이 있었던 거고 유권자들도 원했던 것”이라고 평했다.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교수도 “지역에서 텃밭을 가꿨다든지 개혁성이 있다든지 (후보에게) 남과 차별화되는 경쟁력이 있어야 한다”면서 “이정현 의원, 김부겸 의원의 진정성이 지역 주민들에게 통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박상철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는 “(유권자들에게) 호감도가 있는 후보를 유의적절하게 험지에 출마시키면 당에 대한 불만·비판을 반감시킬 수 있다”고 분석했다.

◆등 떠밀려 나갔다가 미끄덩… 실패한 험지 출마

한국당의 전신인 새누리당은 이미 2016년 20대 총선을 앞두고 ‘험지 출마’ 카드를 빼든 바 있다. 최고위원회 논의 끝에 당 내 ‘거물급 인사’들의 험지 출마 요구를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선거 공학’ 차원에서 타의에 의해 강요된 험지 출마는 결국 실패로 끝났다.

당시 김무성 대표의 공개적 험지 출마 요구에 의해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서울 종로에, 안대희 전 대법관이 서울 마포갑에 나섰다. 그러나 둘 다 낙선했다. 안 전 대법관은 당시 자신의 고향이자 보수 강세지역인 부산에서 출마 채비를 해오다 당의 요구에 뒤늦게 지역구를 옮겼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마포갑의 전직 의원이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하면서 당내 갈등만 노출됐다.

최근 한국당에서는 서울 등 수도권 험지에 김태호 전 경남지사, 홍준표 전 대표, 이완구 전 국무총리 등의 차출설 요구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해 김병준 전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만이 “내년 총선 때 대구에서 출마치 않고 당이 요구하는 험지로 출마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상태다.

민주당에서도 최근 4선 이상 중진, 문재인 정부에서의 장차관 등 고위 관료, 청와대 전·현직 근무자들이 당 안팎에서 험지 출마를 요구받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달 김용진 전 기획재정부 2차관(경기 이천) 등의 관료 출신 후보가 험지에 출마한다고 밝혔지만, 정치적 초년생들만 내몬 꼴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이 교수는 “험지에 출마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장렬히 산화했다고 할 만한 사례가 많지 않다”며 “그만큼 (정치인들이 험지에) 안 가는 거고, 그간의 험지 출마가 지역의 공감을 못 샀다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진정성 없는 일방적 험지 강요 ‘쇼맨십’일 뿐”

전문가들은 선거철마다 반복되는 일방적 ‘험지 출마 강요’가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박 교수는 “쌩뚱맞은 사람을 민심과 크게 관계없는 곳에 출마시키는 건 결국 쇼맨십”이라며 “선거는 정책 위주로 가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유권자들을 만나며 지지를 획득한 사람이 그 지역의 대표가 되는 게 맞는데, 일방적으로 그런 경력·경험을 갖지 않은 사람에게 ‘어려운 데로 가라’고 하는 건 대의민주주의 기본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특히 지도부의 솔선수범 없는 일방적인 남의 ‘등 떠밀기’는 정치적인 감동도 효과도 없다는 지적이다. 최 교수는 “국회의원에겐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현실적으로 중요한데 자긴 안 가면서 남 보고는 무조건 가라는 건 문제”라고 말했다.

 

장혜진·곽은산 기자 janghj@segye.com